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김후주 주원농원 대표

주원농원 대표 김후주 씨가 배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주원농원 대표 김후주 씨가 배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충남 아산시 둔포면 이화동梨華東길에 들어서니, 새하얀 배꽃 물결이 사방에서 일렁였다. 눈 닿는 모든 곳에 배꽃이 활짝 피어있으니, 가는 길목마다 ‘우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는 이제야 꽃이 보이네요.” 주원농원 대표 김후주 씨가 웃으며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 급히 바른 선크림 자국에서 ‘바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전날까지 일꾼 30명과 1만5000평 농장에서 배꽃 인공수분(화접) 작업을 끝냈다고 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농촌 풍경, 눈코 뜰 새 없는 청년농민. 두 모습이 교차되어 보이면서, 문득 그가 신문 칼럼에 적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장르가 뭔지 알아? 판타지야!”

암술에 수술의 화분을 골고루 묻히는 인공수분 작업.
암술에 수술의 화분을 골고루 묻히는 인공수분 작업.
수분을 위해 모아놓은 배꽃 수술.
수분을 위해 모아놓은 배꽃 수술.

청년, 농민이 되다
김후주 씨는 3대째 배 농사를 짓고 있다. 1958년 할아버지 김주원 씨가 배 과수원을 처음 열고, 2003년 아버지 김경석 씨와 어머니 장상희 씨가 유기농을 도입했다. 3년 뒤, 주원농원을 포함한 여섯 농가가 국내 최초로 유기농 배 과수원 인증을 받았다. 어머니는 “자그마치 10년을 고생했다”고 말했다.
  “봄에 흑성병이 안 와서 다행이다 싶으면, 여름에 깍지벌레가 극성이었어요. 가을에 배를 따보니 솜방망이처럼 하얗게 변해있더라고요. 그렇게 매년 하나씩, 농사법을 경험으로 배운 거죠.”
  주원농원이 안정될 무렵, 아버지는 삼 남매 중 큰딸을 불러서 물었다. “농사 배울래, 말래?” 당시 김후주 씨는 대학에서 철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죽어도 농사는 짓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왔던 공부를 잠시 멈춘 이유는, 부모님이 그간 지켜온 유기농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대째 대를 이어 농사짓는 20대 여성. 농사를 막 시작한 김후주 씨는 색다른 타이틀로 소비자의 관심을 받았다. 그런 그가 내세운 것은 자신이 농사지은 배가 아니었다. 단체 활동부터 칼럼 기고까지, 농업·농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일에 더 공을 들였다.
  “제 농산물만 많이 팔면, 그게 당장은 이득이 되겠죠. 그런데 혼자만 잘살 수 있나요. 같이 잘 돼야 저도 수월해지고, 우리 농업이 지속하죠. 제가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사회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소용없어요.”

배꽃이 만발한 농가에서 김후주 씨와 어머니 장상희 씨(오른쪽)가 나란히 앉았다.
배꽃이 만발한 농가에서 김후주 씨와 어머니 장상희 씨(오른쪽)가 나란히 앉았다.

“배가 그냥 열리는 게 아니었군요”
주원농원은 비료, 농약, 경운, 제초하지 않는 4무 농법을 쓴다. 김후주 씨는 “유기농 자재가 아무리 발달해도 해충을 전멸시킬 수 없기에, 생명력이 끈질긴 해충은 직접 손으로 잡는다”면서 칫솔을 쥐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먼저 깍지벌레가 있을 것 같은 곳을 찾아야 해요. 나무껍질을 벗겼을 때 하얀 자국이 있으면 칫솔로 싹싹 닦아서 털어내죠.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응? 1만5000평을?’ 이렇게 반응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면 제가 ‘아~ 며칠 걸려요~’라고 답하죠.”

ⓒ주원농원
ⓒ주원농원

  곤충과 잡초의 도움도 받는다. 김후주 씨는 “유기농은 무슨 유기농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저희 농원에 오시면 벌레가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란다”며 웃었다.
  “여름이면 나무에 거미줄이 잔뜩 걸려요. 저희는 거미, 무당벌레를 죽이지 않거든요. 그게 해충의 천적이 돼요. 그리고 풀은 웬만하면 깎지 않아요. 벌레가 먹을 풀이 없어서 나무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풀이 있어야 벌레가 그 속에 집을 짓고, 거기서 먹고 살아요.”
  퇴비는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우드칩, 계분, 쌀겨, 미생물 등을 발효시킨 퇴비를 땅에 빈틈없이 깔아 토양을 관리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전혀 몰랐던 아르바이트생들이 집에 갈 때가 되면 ‘배가 그냥 열리는 게 아니었군요’라고 말해요. 이럴 때면 10시간, 20시간 강의하는 것보다 하루만 같이 일하는 게 인식 개선에 더 효과적인 것 같아요. 하하.”

캡션
우드칩, 계분, 쌀겨, 미생물 등을 발효시켜 만든 퇴비.

청년을 움직이는 ‘느슨한 연대’
김후주 씨는 농촌의 삶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신과 같은 미혼 여성이 농촌에 내려와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을 다지고 싶다고 한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역에 여성이 혼자 내려왔을 때 느끼게 되는 두려움이 있어요. 농사를 혼자 짓기는 더욱더 어렵죠. 선택지가 많지 않아요. 결혼해서 남편이랑 같이 내려오거나, 여럿이 모여 안정적인 구조를 만드는 거죠. 여성이 농촌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느슨한 공동체’를 만들면 좋겠어요.”
  최근 김후주 씨의 친구가 주원농원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자기 일을 하면서, 주원농원에 일손이 필요할 때 농사를 돕는다. 지역에 ‘믿을만한’ 친구가 있기에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다.

캡션
김후주 씨는 ‘느슨한 공동체’를 꿈꾼다.

  “도시의 팍팍한 삶에 지쳐서 ‘반려식물’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 친구들이 많아요. 특히 20대, 30대 여성이요. 세 평짜리 방에서 온갖 식물을 다 키워요. 방에서 퇴비를 줘가면서 고구마를 키운 친구도 있고요. 반지하 창문에 식물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정작 자신은 햇빛 한 줌도 못 받으며 사는 친구도 있어요. 그 친구들의 소원은 햇빛 받는 땅, 딱 한 평만 갖는 거예요.”
  김후주 씨는 친구들에게 “텃밭 200평 가꾸게 해줄 테니 내려오라”고 권한다. 지역에 아는 사람이 있고, 함께 일할 거리가 있다는 것. 그가 제안하는 ‘느슨한 연대’가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정부 정책이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성차별적이고, 비효율적이죠. 당장 일할 수 있는 동료들이 많아요. 누구든 살 수 있게 문만 열어놓으면, 유입될 수 있는 인구가 엄청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주원농원의 배나무가 홀로 크지 않듯이, 김후주 씨도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같이 성장한다. 환한 배꽃 피듯, 농업과 농촌의 가치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 저마다의 꿈을 피워낼 것이다.

글·사진 이진선

비료, 농약, 경운, 제초하지 않는 4무無 농법으로 키운 주원농원의 배. ⓒ주원농원
ⓒ주원농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