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의 농촌
글 김성희
대산농촌재단 해외농업연수단의 일원으로 지난 5월, 8박 10일 동안 독일, 오스트리아,스위스의 농업 현장을 돌아보았다. 그림 같은 알프스를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초원, 한가롭게 풀을 뜯던 소들, 자부심이 넘치던 농부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꽤 길 것 같던 연수 기간은 잠시 꿈을 꾼 것처럼 지나갔다. 불과 한 달 반가량 지났을 뿐인데, 그곳에 다녀온 일이 과연 현실이었나 싶을 만큼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문득문득 기억의 밑바닥에서 하나둘 떠오르는 일들이 꾸준히 생겼다. 우리 농업과 관련된 통계나 현안, 노후 원전 가동 중단에 관한 뉴스 등이 언론에 등장할 때 도 그랬고,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도 유럽에서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을 불러오곤 했다. ‘해외농업연수’ 는 5월 그 열흘 동안만 진행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기억을 반추하다 보면 나는 여전히 연수단의 정겨운 얼굴들과 함께 중형버스를 타고 출렁이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농업으로 지킨 아름다운 자연경관
경상남북도 동쪽, 가지산, 운문산,재약산 등 1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모여 있는 곳을 흔히 ‘영남알프스’라고 부른다. 일본 나가노현 주변에도 북알프스, 중앙알프스, 남알프스라고 불리는 산들이 있다. 유럽의 알프스를 닮고 싶어 그런 이름을 달았으리라. 알프스는 화보에서나 보며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장관이었다. 그 광경이 너무 좋아 스위스의 툰에서는 이른 아침 융프라우를 마주보며 조깅을 했다. 알프스보다도 더 감동적인 것은 자연을 보존하고 가꾸기 위해 기울인 그 산자락 사람들의 노력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대가 없이 우연히 주어진 게 아니었다. 절제와 조화, 농업을 식량 생산뿐 아니라 자연경관과 문화를 지키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가 촘촘하게 짜인 결과였다. 농촌경관을 아름답게 가꾸고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농업학교와 농촌가정경영학교에서 농사와 조경을 가르치고, 알펜가도 같은 간선도로도 구불구불하고 좁은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지붕의 경사도와 외장재의 색, 간판 등 건물 부착물까지 지역공동체의 합의에 따라 제약하면서 그들은 미술 교과서에 등장하는 명화 속 풍경을 가꿔왔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독일은 단 10년 만에 경제를 복구하고, 1954년 의회에서 농업에 대한 정책(그린플랜), 4가지 기본목표를 정했다고 한다.
첫째, 농민도 일반 국민과 동등한 삶의 질을 공유하며 발전에 참여해야 한다.
둘째, 농민은 일반 국민에게 건강한 식품을 적정한 값에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셋째, 농업을 통해서 국제 식량 문제 해결 및 국제농업교역에 이바지한다.
넷째, 농업을 통해 자연 및 문화 경관을 보존하고 다양한 동식물상을 보존한다.
더 높은 소득을 올려 국민의 소비를 늘리겠다는 목표도 포함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농업에 대한 이런 원칙만은 지금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이웃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농가와 농촌교육기관을 방문해 들은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국민을 위해 농업이 필요하다는 합의에 따라 아예 농·산촌 지역 일정 면적 안에 거주해야하는 최소 인구수를 법으로 정해 놓고, 농민들이 농업을 유지하며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독일은 농부들도 65세면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은퇴한다고 했다.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 농촌 인구의 39.1%가 65세 이상이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이미 떠나고 곧 원치 않아도 떠날 수밖에 없는 노인들이 지탱하고 있는 우리 농촌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 있는 인구17만의 도시 켐텐. 이 지역 농업국장을 지낸 휘머 박사Dr. Josef Hiemer로부터 독일과 유럽의 농업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럽연합은 전체 예산의 50%이상을 농민들에게 직접 지급하는 보조금으로 쓴다. 나라와 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1헥타르당 170유로에서 280유로는 기본이고, 바이에른주 같은곳에서는 유기농업에 대해서는 헥타르당 270유로를 더 주고, 환경에 부담을 덜 주는 농사, 경사가 급한 곳, 응달진곳, 고도와 방향 등을 고려해 ‘조건불리지역’과 농장을 물려받는 후계자나 청년(40세 이하)들에 대해서는 지원금을 더 준다고 한다. 독일 농가들의 평균 경지면적이 47헥타르고, 연평균 농가 소득은 7천만 원가량이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4천만 원 정도가 직불 보조금이라고 한다. 보조금은 지자체 농업국에서 서류를 검토해 넘기면 유럽연합에서 직접 농가에 지급하는데, 비료의 양, 축산 농가의 경우 항생제 사용량도 수의사의 처방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하고 반드시 돌려짓기를 해야 하는 등 농민들이 지켜야 할 의무도 많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던 당당한 농부들
농가 소득을 보전해주기 위해 농산물 가공 판매에 대한 규제는 느슨하게 하고 세제 혜택은 적극적으로 주는 점도 특별해 보였다. 농민들이 만들어 파는 1차 가공식품에 대해서는 부가가치세를 면세해준다. 가령, 농민이 우유로 치즈를 만들어 팔면 부가가치세가 붙지 않지만, 일정 규모를 넘거나 치즈에 다른 첨가물을 넣어 2차 가공을 하면 ‘업자’로 분류해 세금을 부과하는 식이다. 바이에른 주 일러빙켈 지역 렉아우 농민조합은 풀 사료를 먹여 소를 키우는, 목축이 기반인 독일 농업과 농민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66세대가 농민조합에 참여하고 있는데, 도축장과 소시지 등 육류가공식품 공장, 직판장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간 소 100마리, 돼지 1천 마리 정도를 도축해 고기와 소시지를 만들어 판다. 이들이 운영하는 도축장은 100평 정도나될까 싶은 작은 규모였다. 일주일에 소 한두 마리를 잡고, 소시지 가공공장도 소규모 분쇄기와 소시지 제조 기계를 한두 명이 부지런히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우리 정부가 거점별로 대형 도축장을 지정하고 소규모 도축장을 구조조정 하는 것을 ‘경쟁력 강화’ 방안으로 추진하는가 하면, 위생관리 기준만 강조하다 보니 대규모 시설투자가 불가피해 농민들이 선뜻 농식품 가공사업에 나서기 어려운 우리 현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은 누가 누구에 대해 어떤 경쟁에서 이길 힘을 갖는다는 말일까. 소수의 ‘경쟁력 갖춘’ 기업들만 살아남는다면, 그 지역 주민인 농민 생산자들의 삶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는지. 농업과 농촌에 대한 정책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까지 함께 담고 있어야 비로소 완결성을 갖는 게 아닐까.
산악지대인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 피르흐너호프 농장의 발터 크라이들Walter Kreidl 씨는 6헥타르규모의 상대적으로 작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밀과 감자 농사를 각각 1헥타르씩 짓고 나머지는 소를 먹이는 초지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은 밀을 마당 한쪽에 있는 제분실에서 직접 밀가루로 빻고 2백 년 전 나무로 지었다는 농가 맨 아래층 우사에서 젖소 여섯 마리가 생산하는 우유, 100여 마리 닭들이 매일 낳는 달걀을 이용해 빵을 만들어 판다. 부부는 농업기술 학교 동창이며 졸업 후에는 마이스터 자격도 획득했다. 이들은 전국 빵 경진대회 챔피언에게 주는 ‘맛의 왕관Genuss Krone’을 다섯 차례나 획득한 최고 제빵 명인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등장하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하루만 빵을 굽고 구운 빵이 모두 팔리면 가게 문을 닫는다. 빵값도 여느 빵집들과 같다. 우리가 방문한 때에도 이들 부부의 농업학교스승이라는 분이 재생용지 같은 소박한 종이에 둘둘 만 빵을 옆에 끼고 나오며 제자들을 치켜세웠다.
“밀가루를 사다가 더 많은 빵을 만들어 팔면 소득을 늘릴 수 있잖은가?” 우리들의 질문에 대해 크라이들 씨는 “그렇게 하면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키기 어렵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후계자인 25살의 막내아들 발터 주니어가 농장 일을 함께하고 있었다. 농장주는 자식이나 사위 가운데 한 명을 ‘농업후계자’로 지정하고 농장 전체를 상속해야만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식이 여럿이라고 농지를 분할해 물려주면 농장이 유지되기 어려워 사유재산권 일부를 제약하는 것이다. 농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런 정책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태양을 알뜰하게 나눠 쓰고 있구나
렉아우 지역의 마틴 렌Martin Reun 씨 농장은 50헥타르 규모의 전형적인 목축 농가였다. 대부분 기계화되어 있어서 후계자인 아들과함께 가족농으로 이 규모의 농사를 유지할 수있다. 이 농장에는 축분을 이용한 바이오 가스 발전 시설이 있었다. 축분이 토양을 오염시키고 생태순환을 깨트릴 수 있기에 헥타르 당 소 1마리씩만 허용하는 정책에 맞춰 이 농장도 소 50마리를 사육하고 있었다. 사료로 쓰고 남는 풀은 사일리지silage; 생초 등 수분 량이 많은 사료작물로 축분과 함께 발효시켜 발생하는 메탄가스로 전기를 생산한다. 전기는 시간당 40kW 매일 22시간씩 880kWh 생산해, 하루 237.6유로, 한 달에 6천 유로 이상 소득을 올린다. 농가에서 생산하는 전기는 1kW당 27센트로 정부에서 전량 매입한다. 반면 농장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1kW당 23센트다. 정책적으로 친환경 에너지를 권장하고 있다.
독일에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6월 초, 우리 정부는 전력 수요가 매년 2.2%씩 계속 늘어나는 것을 전제로, 핵발전소 2기를 새로 짓는 내용을 포함한 ‘7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최근 신재생에너지 판매 가격마저 폭락하고 있어 시민들이 세운 햇빛발전소들조차 지속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핵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전기요금까지 인하했다. 소비를 절제하거나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는 방향은 아예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톰 하트만이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에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의 원동력이 태양이라고 설명한 대목이 떠오른다. 우리가 먹는 식량은 물론이고 석탄이나 석유같은 화석에너지들 역시 4억5천만년 지구를 뒤덮었던 거대 식물들에 축적된 태양 에너지라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농사를 통해 집약적으로 에너지를 취했기 때문이고, 직접 섭취하지 못하던 태양 에너지인 풀과 나뭇잎마저 가축에게 먹이는 방법을 발견한 뒤 다른생물이 이용할 태양 에너지마저 빼앗아 이용하고 화석연료를 낭비하며 온실가스를 남발하면서 인간은 지구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현란한 간판이 보이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수공예품 같은 간판들이 달려있을 뿐 건물 전면을 가로막고 화려한 색상과 조명을 넣은 우리에게 익숙한 간판들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건물 안의 조명들도 대부분 전력소비가 적은 LED 전등이고, 일부분만 간접 조명을 통해 어딜 가나 분위기가 차분했다. 쇼핑할 때도 따로 말하지 않으면 좀처럼 비닐 백을 내주지 않았다. 시민들 모두가 우리나라의 각별한 생태주의자들 같았다.
소득을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농부의 대답처럼, 그들은 그렇게 ‘잘 살고’ 있었다. 농업을 유지하자는 사회적 합의도 그럴 것이다. 시장의 논리대로만 방치하면 누가 농업을 지속하겠는가. 돈벌이나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욕망을 절제하고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합리적인 순환구조를 갖추어 가는 것. 유럽과 우리의 차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연수단에 함께 참여해 우리 농업 농촌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던 농민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우리라고 왜 할 수 없겠는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 못지않게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왜 소득을 늘려 왔던가. 이러한 질문을 이제부터라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행복은 욕망을 무한 충족시키는 데서가 아니라 절제와 균형, 주변과의 조화,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온다.
※필자 김성희: 한살림연합 기획홍보팀 상무. 사람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며, 우리 농업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한살림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살리는 사람, 농부』(2014, 한살림),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공저)』(2006, 그물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