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환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 농업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져 사시사철 각종 채소, 과일 등 먹거리가 넘쳐났다. 더욱이 모든 상품의 자유 이동을 이상으로 하는 WTO 체제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먹거리를 국내 농업에 의존할 필요가 사라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순식간에 국경과 항만이 폐쇄되고 각국은 필요에 따라 수출을 금지하여 자유무역의 이상은 무너졌다. 더구나 세계 최대 곡물 산지의 하나인 우크라이나가 전란에 휩싸이자 국제 곡물 가격은 급등했다. 코로나19 사태로 2021년 국제 소맥 가격이 20.3% 상승하였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2022년 다시 49.8%가 상승하여 국내 밀가루 제품을 비롯한 식품 가격도 급등하고 있다. 앞으로 강대국 간의 세력 다툼으로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분쟁이 빈발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 불현듯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고 모두가 식량안보 대책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은 2007/8년, 2011년에도 있었고,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식량안보 대책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다. 식량자급률을 높이자, 해외 농업개발을 하자, 국제 곡물 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곡물자급률은 더 낮아지고 해외 곡물 사업은 흐지부지되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일이 있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식량안보의 의미를 새기고 농업을 다시 생각하여 실효성 있는 대책을 당장 추진해야 한다.
식량안보에 대한 착각
식량안보 하면 주문처럼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자. 자급률을 높인다는 목표는 농정의 단골 메뉴였으나 현실은 번번이 더 낮아졌다. 2012년 정부는 2017년까지 곡물자급률을 3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23.4%로 떨어졌고, 2017년에는 다시 2022년에 32%로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2020년에 이미 20.2%로 떨어졌다.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는 국민 1인당 농지면적이 100평이 안 되어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작다. 이 작은 땅에서 쌀은 물론 소비자가 원하는 각종 채소, 과일, 축산물 등을 생산하면서 곡물자급률을 높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결과가 현실의 자급률 하락임을 인정해야 한다. 비용에 상관없이 자급률을 높이려고 하면 조금 높아지겠지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자급률을 말하기 전에 곡물자급률을 1% 포인트 높이려면 도대체 비용이 얼마나 들지, 그러면 식량안보가 얼마나 더 튼튼해질지 솔직하게 논의해야 한다.
식량자급률 제고에 이어 나오는 주문은 농지전용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나라는 농지자원이 어느 나라보다 부족하므로 농지를 아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매년 6만㏊가 넘는 농지가 휴경되고, 결국 폐경에 이르는 농지도 매년 6000㏊가 넘는데 전용을 억제하면 식량자급률이 높아질까? 전용을 억제하여 재배면적이 늘어나면 가격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재배면적이 증가할 수 있을까?
식량안보를 논의할 때마다 제기되는 또 하나 대책은 해외 농업개발 또는 국제 곡물 사업으로 해외에 식량을 확보해 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업이 성공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이 증명한다. 성공하더라도 가격 폭등, 수출 금지, 글로벌 물류 차질이 빚어지면 우리나라 기업이 해외에 확보한 곡물도 예외가 될 수 없으므로 정작 위기가 닥치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럼 식량안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 식량자급률은 주식용 곡물을 기준으로 하고, 곡물자급률은 가축 사료용 곡물까지 포함한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45.8%, 곡물자급률은 20.2%이다. [편집자 주]
식량안보란 우리 밥상을 지키는 것
우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식량안보(Food Security)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식량안보란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먹거리를 항상 적정한 가격에 조달할 수 있는 상태를 보장하여 국민의 밥상을 지키는 것이다. 밥상은 생존조건이자 원초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밥상을 지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여기에 관심과 논의를 집중하고 정책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2000년대 들어 곡물, 과일, 채소의 실질가격은 상승하는데도 휴경지와 폐경지는 늘어나고 거의 모든 작물의 재배면적은 줄고 있다. 이대로 가면 소비자가 원하는, 예를 들면 영양 고추와 의성 마늘, 횡성 한우고기를 시장에서 사 먹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소비자의 밥상을 지키려면 영리적 동기로 소비자가 원하는 이러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정비해야 한다. 비록 해외 공급이 원활하더라도 수입 농산물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농업의 본질은 탄소, 질소, 물 등 무기질을 이용하여 태양에너지를 식물성 생명체로 농축하고 때로 이를 다시 동물성 생명체로 변형하여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업은 인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산업이고 다른 산업으로 대체 불가능한 불멸의 산업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먹거리가 단순히 에너지 공급을 넘어 맛이 있기를 요구한다. 맛이란 음식물을 먹을 때 느끼는 다양한 감각이다. 혀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후각이나 촉각이 느끼는 냄새나 질감, 모양이나 색깔이 주는 시각적 느낌까지도 포함한다. 맛은 식물이 자라난 땅의 물리 화학적 특성, 자라면서 받은 햇빛, 물, 바람, 습도, 병충해 등 모든 환경 요소에 따라 결정되는 식물체의 종합적 특성이다.
그런데 그 종합적 특성에 대한 느낌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리 몸은 이제까지 섭취한 음식물의 축적이므로 그 축적이 특정한 음식물에 대한 느낌을 결정한다. 어느 나라나 자국산 농산물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누구나 어려서부터 먹고 자라난 농산물과 음식에 대한 욕구와 집착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맛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우리 몸에 체화된 문화현상이다. 그래서 호주산 쇠고기가 한우고기를 대체하는 데도, 중국산 고추가 영양 고추를 대체하는 데도 현저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한우고기나 고추 생산량이 반으로 줄어든다면 가격은 폭등하고 보통 국민들은 그 맛을 즐기기 어렵게 될 것이다. 우리의 밥상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농업이 수요를 맞추어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식량안보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농업경영의 지속 가능 조건
첫째, 농업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완충하여 농업경영체가 뜻밖의 벼락을 맞아 위기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경영위험이 클수록 농업을 직업으로 선택하려 하지 않고 투자를 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작황 위험을 낮추기 위해 매우 다양하고 탄탄한 작물 보험제도를 대부분 작물에 적용하고 있다. 또한 중요 농산물의 가격위험을 완충하기 위해 가격이 지나치게 하락하면 그 일부를 기준연도 재배면적에 따라 보전하는 가격손실보전(PLC)제도를 오랜 세월 운용하고 있다.
둘째로 우리나라 농업 전반을 데이터에 의존하는 스마트 정밀농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건을 정비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농업경영주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70세 이상 농업인력은 속속 농업을 떠날 수밖에 없고, 그 자리를 메꾸던 외국인 노동자는 언제 공급이 차단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별 경영체가 비록 규모가 크더라도 스마트농업을 단독으로 시행하기 어려우므로 지역 단위로 스마트농업 서비스를 공급하는 업체가 생성, 발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필요한 농산물의 상당 부분은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해외 공급이 부족한 위기에 대응하는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소비자 밥상을 지킬 수 있음은 물론이다.
위기 대응, 어떤 상황에 대비하려고 하는가?
위기 대응을 말하지만 어떤 상황에 대비하려는 것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한 가지 상황은, 기후변화와 저탄소 농업 등으로 세계적으로 생산이 부족하여 해외 조달이 어렵고 가격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경우이고, 또 다른 상황은 단기적 공급 부족 혹은 글로벌 공급망에 이상이 생겨 일시적으로 조달하기 어려워지는 경우이다.
장기적 부족 상황에 대응하려면 우리나라는 농지자원이 절대 부족하므로 식량 수급을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축산물 소비와 생산을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사료 수요를 줄이고, 토지 이용과 농산물 소비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체계를 수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최근의 가격 급등으로 식량안보에 관한 관심이 높지만, 실질가격으로 보면 2008년과 2011년 폭등 수준을 넘지 않고 1970년대 파동 수준보다는 훨씬 낮다. 국제 재고량도 당시보다 풍부하여 국제 곡물 시장에 나타나는 간헐적 파동의 하나일 수도 있다. 앞으로 국제 곡물 수급은 중국 등 거대 개도국의 식품 수요 증가, GMO 등 단수 증가 기술, 기후변화와 저탄소 농업 등 공급 요인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달라질 것이다.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지금 당장 통제 위주의 대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또한 그러한 상황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기보다는 일시적 공급 부족이 반복되면서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므로 그런 추세를 주시하며 단계적으로 치열한 검증과 논의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통해 단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필수 농산물 비축제도 시급, 지금 당장 행동해야!
따라서 위기 대응은 우선 흉작, 국제 분쟁, 물류 라인의 장애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물량을 확보하기 어렵거나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에 대비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필수 농산물 비축제도를 식량안보의 핵심 수단으로 시행해야 한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EU 가입으로 역내 조달이 항상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매년 1월이 가기 전에 일 년간 필요한 먹거리의 부족분을 전량 비축하는 제도를 운용하였던 것을 배워야 한다. 비축을 위해 정부가 창고를 지어 쌓아두는 방식으로 비용을 들일 필요는 없다. 해당 식품을 수입하거나 거래하는 민간기업이 자체 시설에 보관하고 정부가 IT 기술을 이용하여 실시간으로 재고를 관리하면서 그 추가 저장 비용을 지원하면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길어지고 인근지역으로 확산할 위험성도 있다. 당장 올해 생산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내년 곡물 가격은 더 폭등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국내 비축을 늘리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필자 이정환: GS&J인스티튜트 이사장.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원장, 한국농업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농업 부문 계량모형 개발을 시작으로 농지, 인력, 쌀과 한우, 통상 문제 등을 주로 연구하며, 농민신문과 내일신문 등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