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농업연구관
(제30회 대산농촌상 농업공직 부문 수상자)
사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다.1) 추석이면 차례상에 올리고, 감사한 이들에게 선물로 전한다. 이 무렵에는 하늘이 기막히게 높아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눈부신 볕에 붉은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이때, 농민만큼이나 부지런히 사과를 거두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사과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신품종을 개발하는 연구자들이다.
세대를 지나며 발전하는 연구
권순일 연구관은 1993년부터 30년 가까이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소에서 사과를 연구한 ‘사과 박사’다. ‘아리수’, ‘썸머킹’, ‘루비에스’, ‘컬러플’, ‘골든볼’, ‘아리화’, ‘이지플’ 등 국산 사과 30여 종을 개발해 농민과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새로운 추석 사과로 주목받고 있는 ‘아리수’는 1988년 개발된 우리나라 1호 추석 사과 ‘홍로’의 계보를 잇기 위해 개발된 품종이다. 소비자가 선호하는 중간 크기의 빨간 사과로, ‘감홍’과 ‘후지(부사)’처럼 새콤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으며, 과육의 갈변 현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홍로’에 비해서 높은 기온에도 착색이 잘 되고, 수확 전 열매가 떨어지는 낙과 현상이 적다.
“‘아리수’는 1994년에 ‘양광’, ‘천추’를 교배한 품종이에요. 2010년에 나왔으니 16년 정도 걸렸네요. 2013년에 품종 등록을 완료해서 2014년에 농가에 보급을 시작했고요. 품종이 하나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땅도 많이 차지하니까, 민간에서 육종하기 쉽지 않아요.”
사과 연구는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미래로 이어진다. 권 연구관은 “지금 내가 하는 건 다 후배들을 위한 거고, 나는 선배들이 남긴 걸 잘 정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육종 시스템이 보완되고, 점차 완성도 높은 품종이 나온다.
“씨앗을 받아서 땅에 뿌리고 첫 꽃이 필 때까지 10년에서 15년이 걸리거든요. 어떻게 하면 꽃이 빨리 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나무를 작게 자라게 하는 ‘왜성대목’에 접목해서 그 기간을 5년으로 줄였죠.”
사과 한 알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사과나무에 첫 꽃이 피면 연구사들은 바빠진다. 새 품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 판단하면서, 연구 목적에 맞는 사과는 두고 나머지는 도태시킨다. 이 과정을 한 번, 두 번, 세 번, 또는 그 이상 반복한다.
“육종은 확률을 높여가는 과정이에요. 원하는 품종이 나올 가능성이 1%였다면, 다음 단계에서 5%가 되고, 그다음에는 50%가 되게끔 하는 거죠. 사과나무는 1년에 한 번만 열매를 볼 수 있으니까, 성공 확률을 높이도록 예측을 잘하는 것이 중요해요.”
사과가 열리는 시기에 일주일에 두 번씩, 연구자들은 실험포장에서 사과를 40~50개씩 수확해서 겉모습을 살피고 맛을 본다.
“초임 때는 호기롭게 다 먹어봤어요. 시큼해도 다 씹어 먹었는데, 위장병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는 나무 앞에 딱 서서 낙과가 있거나 색이 불충분하면 아예 맛을 안 봐요. 외관이 멀쩡하면 먼저 향기를 맡고요. 식초 향이 나면 넘기고, 괜찮다 싶으면 혀끝을 살짝 대봐요. 그렇게 통과한 것들만 여러 개 따서 다 같이 먹어보는 거죠.”
권 연구관은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농민, 유통인, 소비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민은 재배법과 수량, 유통인은 저장성, 소비자는 맛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품종이 나와도, 알려지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농가에서 새로운 품종을 길러서 판매하려고 해도 공판장에서 잡사과 취급을 받는 거예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는데 본청에서 유통 연구하는 분들이 신품종 사과에 대한 공동출하를 제의했어요. 이거다 싶었죠. 1년짜리 프로젝트였는데 제가 요청해서 4~5년 더 하게 되었어요.”
서로서로 돕는 우리
“2003년에 개인 과수원을 임대해서 직접 농사를 지어봤어요. 5년 정도 했는데, 사과를 재배하는 농가의 애로사항이 그대로 느껴지는 거예요.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과를 키우는구나, 그러니까 품종이라도 좋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는 농민과 쉽게 소통할 창구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2018년부터 밴드와 같은 SNS를 통해 ‘썸머킹’과 ‘아리수’, ‘루비에스’ 그룹을 만들어 농가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농민들도 저마다의 상황을 전하는 글과 사진을 올리고, 자신이 가진 기술을 다른 농가에 전한다.
“품종에 맞는 재배법을 제대로 구현해야 제 특성이 나와요. 농민들이 이거 몹쓸 품종이다, 생각하면 안 되니까 제대로 된 정보를 드려야죠. 밴드를 통해 알게 된 어느 농민이 최근에 저한테 고맙다는 문자를 보냈어요. 올해 농사를 잘 지어서 가격을 잘 받았대요. 이런 연락이 오면 무한 에너지를 공급받은 기분이 들어요.”
2022년 2월, 권 연구관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본원으로 자리를 옮겨 기획조정과에서 사업운영 총괄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농민을 지원하는 일을 중점적으로 했다면, 지금은 다른 연구자들의 업무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제가 30년 동안 사과 연구에 몰두하는 동안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저도 다른 연구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다가, 다시 사과연구소로 돌아가서 우리나라에서 많이 재배하고 소비되는 일본 품종 ‘후지’를 대체할 사과 연구에 힘을 쏟고 싶습니다.”
권 연구관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꾸준함’이라고 했다. 해마다 빠짐없이 씨를 뿌려야, 커다란 수레바퀴를 굴리듯 매년 연구를 지속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진득하게 기다리는 시간 역시 소중하다. 그렇게 사과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우리 손에 사과 한 알이 들어오게 된다.
1) 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21 식품소비행태조사 통계보고서》, 646~648쪽 참조.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