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밭을 담은 한 조각, 농부의 빵

선강래 농부의 빵집 ‘그랑께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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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군에서 농부의 빵집 ‘그랑께롱’을 운영하는 선강래 씨(오른쪽)와 아내 김혜진 씨.

  전남 장흥군, 한적한 찻길을 달리다 ‘그랑께롱’ 표지판을 따라서 차머리를 돌리니,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꽃으로 덮인 대지가 펼쳐졌다. 그 앞에 깔끔하게 지어진 양철집의 문을 열자 갓 구운 빵 냄새가 훅 밀려왔다. 안쪽에서 선강래 씨가 크루아상, 뺑오쇼콜라, 구겔호프 같은 빵을 굽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라디오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에릭 사티의 ‘그대를 원해요Je Te Veux’ 를 들으면서, 잠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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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꽃으로 덮인 대지.

농부의 빵집, ‘그랑께롱
  선강래 씨가 오븐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꺼냈다.
  “평소에는 식사용 빵을 만드는데, 오늘은 추석을 앞두고 특별히 버터를 넣은 ‘달달구리 빵’을 준비했어요. 지역에 사는 분들도 이런 빵을 원하는데 먹을 기회가 별로 없어요. 저희도 매일 만들기는 어렵고 특별한 날에만 이렇게 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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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오쇼콜라.

  ‘그랑께롱’은 농부가 직접 재배한 밀로 빵을 만들어 파는 ‘농부의 빵집’이다. 우리 품종인 ‘금강밀’, 여러 농민을 통해서 구한 스위스산 밀을 사용한다. 바게트, 루스틱, 치아바타처럼 밀 본연의 맛을 살린 담백한 빵, 국산 잡곡 또는 매생이와 같은 지역 특산물을 넣은 빵을 주로 낸다.
  “그랑께롱, 어감 좋죠? 전라도 사투리를 모르는 분들은 프랑스 말인 줄 아세요, 하하. 그랑께롱은 맞장구치는 말이에요. 누가 어떤 말을 하면 그랑께롱, 그랑께, 그러니까, 그렇지! 이렇게 답하는 거죠.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잖아요. 제가 만든 빵을 누군가 드시고, 그 가치를 알아주시고, 맞장구쳐주시고요. 이런 소통의 의미를 담았어요.”
  ‘그랑께롱’은 수, 목, 금요일에 문을 연다. 미리 온라인으로 주문받은 빵을 택배로 보내고, 금요일 오후에는 지역민들이 편히 찾아갈 수 있도록 읍내로 배달한다.

직접 기른 우리밀로 빵을 만든다.
직접 기른 우리밀로 만드는 빵.

예술가에서 농부제빵사로
  선강래 씨는 2013년에 장흥에 터를 잡았다. 그는 대학에서 연희演戱를 전공한 예술인으로, 지역에 있는 학교에서 국악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사 오면서 농지를 300평 정도 빌렸어요. 농작물 키우는 걸 좋아했거든요. 새벽에 일어나서 농사짓고, 학교 다녀와서 또 농사짓고, 그게 너무 좋았어요. 2014년에 새로 땅을 구하게 되었는데 상태가 안 좋더라고요. 호밀을 심어서 땅을 개선해야겠다 싶었는데, 사료용 호밀 씨앗을 보급받았어요. 이왕이면 사람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토종 종자 ‘앉은뱅이밀’을 구해 심었죠.”

밀과 메밀을 번갈아 키우는 밭에서.
밀과 메밀을 번갈아 키우는 밭에서.

  밀을 처음으로 수확한 가을, 지역에서 마땅한 제분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밀단을 따로 보관할 창고가 없어서 적당히 비만 가려놓았더니 벌레가 들었다.
  “그래도 다음 해에 또 밀을 심었어요. 수확하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경기 양평군에서 빵 공방을 하는 곽지원 선생님이 우리밀 아카데미를 시작한다는 글을 봤어요. 와, 이거다! 싶어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는데 해보래요. 나중에 들어보니 제 눈이 되게 초롱초롱했대요.”
  월·화요일에 학교에서 강의하고, 수·토요일에 양평에서 제빵 수업 듣고, 목·금요일에 서울에 있는 우리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일요일에 농사짓는 생활이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어느 날, 읍내에 공유 공간을 만든 활동가들이 제게 빵집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덕분에 2017년에 ‘그랑께롱’이라는 이름으로 빵집을 정식 오픈했고요. 1년 정도 하다가 이곳에 건물을 짓고서 2019년 11월에 다시 오픈했어요.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진 거예요. 자연스럽게 택배 중심으로 가게 되었죠.”

천연 효모로 발효해서 만든 깜빠뉴, 초코빵, 루스틱.
천연 효모로 발효해서 만든 깜빠뉴, 초코빵, 루스틱.

더 맛있게, 더 재밌게
  선강래 씨가 얼마 전 손님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를 보여줬다. “귀한 빵을 문 앞에서 편하게 받아먹기만 해서 송구스럽다. 감사하다”는 인사가 적혀 있었다.
  “이럴 때 제일 큰 힘이 돼요. 아내도 당신이 만들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빵이 맛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줘요. 그래도 저는 조금 더 잘하고 싶어요. 최근에는 3개월 동안 매주 월, 화요일에 서울에 가서 프랑스 빵 교육을 받었어요. 제가 배우는 걸 너무 좋아해요. 기회만 되면 더 공부하고 싶어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고즈넉한 빵집.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고즈넉한 빵집.

  2022년 5월에는 대산농업연수에 다녀왔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근처에 있는 빵집을 찾아다녔다. 맛있어 보이는 빵을 골라서 동료들과 나눠 먹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우연한 기회에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어요. 비스 순례 성당에서 소리를 하는데 제가 더 감동적인 거예요. 예술이라는 게 이런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빵만 만들다가 죽을 수는 없겠구나,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한 일을 꾸려볼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밀과 메밀이 가득한 밭 안에 작은 무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소박한 무대에 그랜드 피아노 한 대, 멋지지 않나요?”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8월 전남 구례군에서 열린 ‘우리밀 빵장’의 배턴을 이어받아, ‘그랑께롱’ 앞마당에서 우리밀 빵을 주제로 한 농부시장도 열어볼 생각이다.
  다시, 가슴 뛰는 순간을 찾아 나서겠다는 선강래 씨의 눈이 반짝였다. “그랑께롱!”이라고 맞장구치며 함께 어울릴 사람들을 바라보는 듯, 환한 얼굴이었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