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지역을 지탱하는 힘

글·사진 신수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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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알고이 지역 한 농가형 호텔에 이틀간 묵었다. 소를 키우는 농장 안에 호텔, 식당, 수영장, 실내외 놀이터와 휴식 공간, 그리고 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이었다. 첫날 아침, 새소리와 환한 햇볕의 협업에 일찍 잠을 깼고, 그 김에 산책길에 나섰다. 새벽에 내려앉은 이슬을 잔뜩 머금은 풀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초원이 눈부셨다. 마침 마구간에서 나온 말이 멀뚱멀뚱 쳐다보길래 잠시 눈 맞춤 하고 걸음을 옮겨, 2차선 도로 건너편 너른 초지를 점령한 듯 도도하게 거니는 고양이를 만나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몇 대 보내며 10여 분 남짓 걸었을까. 농장에서 내려다보이던 마을의 중심부에 다다랐다. 때마침 교회 종이 울리고, 이제 막 문을 연 빵집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아담한 주택들이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었는데 그 집 마당은 물론, 길가 어디에도 휴지 한 조각 보이지 않았다. 몇 년 전 독일 다른 농촌에서 비슷한 광경을 보고 놀라자, 안내하던 분이 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 우리 온다고 청소한 거 아닙니다!”

독일 농가민박형 호텔 창문으로 바라본 풍경.
독일 농가민박형 호텔 창문으로 바라본 풍경.
아침 산책길, 농가에서 마주친 말.
아침 산책길, 농가에서 마주친 말.

문화경관을 지키는 농민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정책
알프스 풍경은 경이롭다. 만년설이 내린 웅장한 산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아래 숲, 초지, 아담하고 예쁜 집들과 풀을 먹는 소. 완벽하게 조화로운 풍경은 오랜 시간 사람이 살면서 만들어낸 자연과의 합작품이다.
  “알고이 지역 소들은 매년 5월 말에 산으로 올라가서 9월에 마을로 내려옵니다. 소가 산 위에서 풀을 먹지 않으면 겨울에 눈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고,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초지가 금세 덤불로 뒤덮여 아름다운 경관이 훼손될 거예요. 농민이 만드는 문화경관이 관광객을 부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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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켐프텐시 농업국장으로 재직하다 은퇴한 요셉 히머Josef Hiemer 박사는 “농업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문화경관을 유지 보전한다는 것이 EU 농업정책의 기본목표”라고 말했다.
  1962년 시작된 EU의 CAP(공동농업정책)은 농민 소득보조를 위한 직불금과 농촌 환경 보존과 개발을 위한 두 가지 축으로 나누어 열악한 환경에서도 농민이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한다. 7년마다 정책이 보완되는데 회원국과 지역 정책은 큰 틀 안에서 상황에 맞추어 변주한다. 독일 최대 농업 주인 바이에른주 식품농림부에서 만난 마틴 쉬블러Martin Schubler 대외협력 담당자는 2023년부터 시행될 바이에른주 농업정책 방향을 ‘청년농업인, 소농 중점 지원과 환경에 대한 의무 강화’라고 하면서, 1축인 직불금 예산을 일부 전용해 2축의 농촌개발 부문에서 환경을 개선하고 동물 복지, 수질 보호 등에 더욱 집중한다는 방침을 말했다.
  “농업에서 탄소 발생을 줄이기 위해 규제를 강화합니다. 예를 들어 농지 전체의 4%는 휴경해야 하고, 흙 속에 사는 멸종 위기의 생물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기간 풀을 깎아서는 안 됩니다. 사회가 농민에게 요구하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쉬블러 씨는 EU의 새로운 정책의 방향이 유기농업 등 환경을 위한 지원을 확대하고, 5개 작물 이상 윤작하면 추가 지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면적별로 세분화하여 소농을 지원하는 것과 함께 눈에 띄는 청년농업인 정책은 5년간 정액(ha당 135유로)으로 지원금을 추가 지원하는데, 그 대상은 농업직업학교를 나온, 이른바 ‘농민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다. 농업 관련한 교육은 교육부가 아닌 농림부가 담당한다는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독일의 직업학교는 학교와 현장의 듀얼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독일의 직업학교는 학교와 현장의 듀얼시스템으로 운영된다.
현장에서 배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강하는 학교 실습.
현장에서 배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강하는 학교 실습.

농민자격증있는 농민을 키운다
켐프텐농업직업학교
켐프텐농업직업학교 입구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시크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마침 교정에서 원예반 학생들이 나무를 심는 실습을 하고 있었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한 학생이 포크레인으로 크게 흙을 파고, 다른 학생이 삽으로 세밀하게 흙을 판 후 나무를 심는 과정이었다.
  독일의 직업학교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과정으로, 듀얼시스템Dual System, 즉 학교와 현장이 협력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이 시스템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람들의 경험을 세분화하고 현실적인 교육을 위해 만들어서 50년이 넘은 역사 속에서 인정받고 있다.
  3년 과정 중 1학년 때는 일주일에 4일 학교 교육을 받고 1일은 마이스터가 있는 농장에서 실습한다. 2~3학년이 되면 현장에서 4일, 학교에서 1일 이론교육을 받으면서 현장에서 배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여 배운다.
  이날 우리를 안내한 마리오(Mario, 17세)는 원예학과 학생이라고 본인을 소개하며 현장 실습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침 7시에 실습장에 출근해 연장을 챙기고 현장으로 가서 그날 할 일을 받아요. 화단의 돌을 깔거나 나무 가지치기, 잔디를 깎는 일 같은 거죠. 3년간 농장에서 마이스터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실무를 익히면서 대략 900~1200유로를 월급으로 받고 있어요.”
  입학 후 1년 6개월 후에 중간시험을 보고,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시험을 통과하면 ‘농민자격증’을 받는다. 그 뒤 2년 이상 현장경험을 거치고 과정을 이수하면 마이스터가 되는데, 전문농업경영인인 마이스터는 학생을 책임지는 교육자로서 역할을 하는 듀얼시스템의 중요한 기둥이다.
학교의 시설을 둘러보는 도중 조경 실습을 하는 학생 중에 또래보다 나이 든 학생이 있어 물어보니,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이라고 정원 교육 담당 교사 호프만 씨가 설명해주었다.

독일의 농업직업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 을 인정받는다.
독일의 농업직업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인정받는다.

  농민이 되겠다는 의지를 지닌 후계농이 대부분이지만, 농지가 없더라도 본인이 실습할 마이스터 농장을 확보하면 농업직업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전인교육을 표방하는 농업직업학교의 커리큘럼은 식물, 가축사육, 기계공학, 경영관리 등 세분화되고 각각 과목에서 필요한 모든 부분을 배운다. 농업학교 출신이 사회에 나가면 경력을 인정받고 환영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교사, 엔지니어, 약사, 의사 등을 꿈꾸며 대학 진학을 목표로 준비하는 학생들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듀얼시스템으로 흙과 식물, 농업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 좋다”며 높은 만족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농업인의 자격, 그것은 앞서 말한 농업정책의 대상이자 중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농민자격증’이란 EU와 국가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학교와 농장의 듀얼시스템을 전문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범농장적 교육을 진행한다. 바이에른주는 농림부, 다른 주에서는 농업회의소 같은 국공립 전문농업기관에서 숙식하며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의무적으로 시행한다. 그렇게 전문가로서의 농민이 탄생한다.

빌트폴츠리트는 재생에너지로 전기 828% 자급률을 달성했다.
빌트폴츠리트는 재생에너지로 전기 828% 자급률을 달성했다.

지역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협력한다
재생에너지시
빌트폴츠리트
빌트폴츠리트는 독일 남부 오버알고이 지역에 있는, 2500명이 사는 지방자치단체이다. 2000년 1월, 이 지역 의회는 만장일치로 202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생산해 에너지를 자립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한다. 1998년부터 1년간 주민들이 모여 지역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꾸준히 해온 결과였다. 이산화탄소를 적게 생산하고, 어린이들에게 좋은 미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기술적인 투자를 하며, 바람, 해, 물, 바이오가스 등 자연환경에서 나오는 것들을 충분히 이용해 재생에너지 생산을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죠. 하지만 매일 같이 고민하고 행동하니 이루게 되더라고요.”
  토마스 프뤼거Thomas Pfluger 시의원은 당시 시장이었던 아르노 젠게를레Arno Zengerle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주도해나갔고, 여기에 전문가가 전문 영역을 담당하고 또 의회는 당에 상관없이 함께 힘을 모았다고 회상했다. 때마침 독일 재생에너지법EEG이 발효(2000년 4월)되고 정부가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를 20년간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쳐 지역의 사업은 순풍을 탔다. 지역에서 만든 재생에너지 대한 수익금으로 마을의 모습이 바뀌어 나갔다.
  2022년 현재, 빌트폴츠리트 시는 바람과 햇빛, 물, 나무, 그리고 축분에서 나오는 바이오가스로 전기 사용량의 828%를 생산한다. 2020년까지 100% 자급하겠다던 목표가 8배 이상 달성된 것이다. 이 작은 지역의 성공 사례를 보려고 매년 세계 100여 국에서 찾아온다.
  겨울이 춥고 긴 알프스 지역이지만 난방자급률 또한 60% 를 넘고, 이 역시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다.
  “2005년부터 난방시설에 집중적으로 투자했어요. 시설에서 나오는 열이 소비자한테 가다가 식어버리니 이를 개선하기 위해 시내 근처에 난방시설을 만들었어요. 2020년까지 연장한 파이프 길이가 3597m인데, 이 파이프로 80여 개의 건물과 관청, 모든 공공시설과 10개의 산업단지, 170여 가구 등에 난방을 공급해요.”
  풍력발전기는 현재 총 9대가 있는데, 40%를 시민이, 60%는 은행자본으로 1000만 유로를 투자해 현재 출력이 17.6MW이다. 400가구에 이르는 투자자들은 5년 후 투자금을 회수하게 되는데, 발전기의 수명으로 볼 때 앞으로 30~40년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초기 발전기 2대는 출력이 낮고 소음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철거했고, 최근의 풍력발전기는 소음이 매우 적어 주민들의 민원은 없습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프뤼거 씨가 말했다.

신재생에너지 수익금은 지역에 남아 주민들을 위해 쓰인다.
재생에너지 수익금은 외부로 나가지 않고 지역에 남아 주민들을 위해 쓰인다.

  독일 정부가 보장한 전력 매입 기간이 끝나면서 지역 사람들이 쓰고 남는 잉여전력을 활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RWTH(아헨)공대와 지멘스 회사 등 산학연의 연구 성과가 이어졌다.
  “재생에너지에 투자를 많이 했는데 2020년 이후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면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맞댔죠. 2년간의 시험 기간을 거쳐 데이터 정보를 공유했고, 순수 자연에너지로 만들고 전기를 저장하는 시설을 만들었어요. 스마트한 기술로 전기는 배터리, 온수는 큰 물통에 저장해둡니다.”
  빌트폴츠리트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전기 자가소비와 잉여전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빌트폴츠리트가 재생에너지로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700만 유로 정도. 프뤼거 씨는 이 돈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역에 남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주민의 관심과 참여 덕분입니다. 여기에 전문가, 의회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는 데 있죠. 가장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에너지 절약을 생활화한 것입니다.”
  지역을 살리는 힘은 어쩌면 거창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될지 모른다. 사소한 불편과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며, 협력과 연대의 끈을 잡을 ‘결심’ 같은 것.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지역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이다.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지역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