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농촌의 삼중三重 위기

김정섭

농업·농촌의 현실을 ’삼중三重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짚어본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삼중三重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짚어본다.

“현대사회에서 농업은 시장의 위험과 자연의 위험이라는 이중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1)는 중국의 석학 원톄쥔 교수의 말은 한국 상황에도 들어맞는다. 여기에, 대중이 농촌을 몰각沒覺하고, 정치나 매체로부터 농촌이 패싱Passing 당하는 ‘사회의 위험’을 덧붙일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 농업·농촌의 현실을 ‘삼중三重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짚어볼 것이다. 정면을 똑바로 못 보는 사시邪視라면 옆집에 부처가 살아도 알아보지 못할 테니, 처방에 앞서 진단이라도 정확히 해보자는 것이다.

경제의 위기
요즘에는 농업에서 외부 투입재, 새로운 테크놀로지, 신용 등이 중요한 자원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요소들이 강조되는 건 농민이 새로운 의존 관계에 엮이게 됨을 뜻한다. 농가 외부의 행위자(농약회사, 비료회사, 금융기관, 컨설턴트, 임노동자 등)에 의존하지 않고는 농사짓기 어렵다고들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농가 외부의 자본집단이 가하는 ‘이중 쥐어짜기Double Squeeze’를, 즉 농산물 가격은 낮은 채로 머물면서 생산 비용은 상승하는 이 곤경을 극복하려면 규모를 확대하거나 테크놀로지에 근거한 자본집약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흔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탈출에 성공한 농민은 드물다.
  눈여겨보아야 할 게 몇 가지 있다. 첫째, 농업총수입은 계속 증가했지만 농업총수입에서 경영비를 뺀 농업소득이 1990년대 초중반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계속 정체 상태라는 점이다.2) 농업소득이 장기간 정체된 것은 농산물 시장 개방 폭이 커져 싼값에 들어오는 외국 농산물 때문에 국내산 농산물 가격이 억제된 탓이 크지만, 인건비와 농자재 등 투입 비용이 계속 상승한 탓도 크다. 둘째는 농가소득 중 농외소득 및 이전소득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농가로서는 살림살이를 유지하려면 농사가 아닌 다른 경제활동 기회를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농외소득 비율이 높아진다. 한편, 도시의 근로자 가구 연평균 소득의 약 3분의 2 수준에 불과한 농가소득을 뒷받침하려는 직불제 등 보조금이나 고령농민에게 지급되는 기초연금이나 자녀의 용돈 등과 같은 이전소득도 농가소득 구조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높아졌다.
  농업소득 전망이 어두운 상태에서, 농가의 선택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농업총수입을 계속 늘려 농업소득을 유지하려는 선택이다. 이를 지향하는 농가는 가능한 한 넓은 재배면적 또는 사육두수를 확보하려 애쓴다. 다른 하나는 ‘돈 되지 않는 농사’에 힘을 덜 쓰고 농사가 아닌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선택이다. 이런 선택을 한 농가는 이른바 ‘취미농’이 될 것이다.
  이처럼 웬만해서는 농사만 지어서 먹고살 만큼의 소득을 얻을 수 없으니, 청년농민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100만 농가 중 경영주가 40세 미만인 농가가 1만 가구, 즉 1%쯤이다. 앞으로 10년 뒤 청년농민은 몇이나 남아 농사짓고 있을까? 자부심과 자율성을 몸에 새긴 청년농민은 더욱 드물다. 부모가 물려주는 땅이 없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영농기반을 확보하기가 아주 어렵다. 농사 시작과 동시에빚을 내야 할 판이고, 정부 보조금이라도 얻을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의존은 자율의 반대말이다. 빚내고 신세 지기 시작하면 고개 숙이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역사적으로 농민은 늘 약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자율성과 자주성을 추구한 존재였다. 때로는 소규모 자작농보다 소작농이, 소작농보다 농업 노동자가 돈을 더 많이 버는 일도 있었지만, 그때에도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나 소작농이기보다는 자작농이기를 원했다. 몇 해 전 어느 영화배우가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말을 남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금 “우리 농민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고 말할 수 있는 젊은 농민은 얼마나 될까?

기후환경의 위기
서구의 산업혁명 이후로 기후가 급격하게 바뀌어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 활동이 지구 생태계의 근간인 기후에 영향을 크게 끼치는 현재 지질 시대를 ‘인류세人類世’라고 부를 지경이 되었다. 한국 사회도 근년 들어 ‘기후위기’라는 말로 들끓고 있다.
  생산과 소비는 인간 생활의 ‘낮과 밤’이라고 비유해도 괜찮을 만큼 근본적인 패턴이다. 그중에서도, 농업 생산과 먹거리 소비는 가장 필수적인 패턴이다. 자연생태계에 대한 개입 없이는 그 어떤 종류의 생산도 불가능한데, 농업은 특히 독특한 생산활동이다. 식물의 유전적 재생산 기능을 인간이 활용해 유기물을 추출하는 활동이다. 그런데 식물은 태양, 물, 이산화탄소, 산소 없이는 재생산되지 않는다. 햇빛으로 전달되는 에너지를 이용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물을 결합함으로써 탄수화물 등 유기물을 생산하고 부산물로 대기 중에 산소를 배출하는 과정, 즉 광합성이 식물 재생산의 핵심이다. 농업은 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형태의 유기물을 만드는 특정 식물의 수량을 인위적으로 증대시키고, 씨앗 등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중에서 필요한 유기물을 거두어들이는 활동이다. 즉, 자연생태계의 일정 부분을 조정하고 재생산 과정을 변형하는 인간의 개입이다. 이에 비해 제조업의 주된 원료인 무기물은 재생산 없이 땅으로부터 추출된다.
  기후위기의 핵심은 온실가스 증가로 인한 지구 표면 온도 상승이다. 수증기(H2O), 이산화탄소(CO2), 메탄(CH4), 아산화질소(N2O), 수소불화탄소(HFCs), 과불화탄소(PFCs), 육불화황(SF6) 등 온실가스의 종류는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이산화탄소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인간 활동 때문에 발생하는 온실가스 중에서 이산화탄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80%나 되기 때문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대부분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땅속에 묻힌 탄소를 캐낸 것)를 태워 사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2020년 12월 대통령이 ‘2050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흡수량을 늘려서, 30년 뒤에는 한국에서 ‘이산화탄소 장부’상 수치가 0이 되도록 하겠다고 국내외에 입장을 밝혔다.
  농업이 온실가스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산화탄소의 순환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점, 산림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넓은 토지 면적을 차지하는 게 농지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기후위기 담론에서 농업 이야기를 생략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기후위기-농업 담론’은 한국에서는 아직 빈약하다. 더러는 오인誤認과 무시에 바탕을 둔 헛소문과 오류 가능성이 높은 정책 제안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가령, 저탄소농업의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유기농업을 열심히 하면 그 자체로 탄소를 땅에 많이 밀어 넣을 수 있느냐는 물음도 가능하다. 무경운 농법을 두고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영농기술상의 쟁점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고,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지만 대체로 동의되는 지점이 하나 있다. 기후위기 그리고 환경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농업 부문의 노력이 단지 농법상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간과하지만, 농민이 농법을 바꾸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농법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농민이 보유한 토지, 노동력, 자본, 생산한 농산물의 판매 가능한 경로 등 제반 여건이 중첩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일정 정도는 농민이 결정한 선택지가 바로 ‘농법’이다. 즉, 일반 시민들도 각자의 조건에 따라 생활양식Lifestyle이 다른 것처럼, 농민들도 각자의 조건에 따라 영농 스타일Farming Style을 영위한다. 문제는 생활양식을 바꾸는 게 쉽지 않듯이, 영농 스타일을 바꾸는 것도 아주 어렵다는 데에 있다.

‘읍·면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경제권’이 붕괴하는 과정은 농촌 내부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국 사회가 농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외면한 결과다.
‘읍·면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경제권’이 붕괴하는 과정은 농촌 내부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국 사회가 농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외면한 결과다.

사회의 위기
농촌-사회의 위기는 도시의 질주하는 욕망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잉여Redundant 인간을 처리하는 장소로 사회가 농촌을 동원할 때, 즉 대중이 농촌을 쓰레기 처리장처럼 대할 때 일어난다. “우리는 극히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레기를 처리한다. 즉 쓰레기를 보지 않음으로써 보이지 않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3) 외면당한 이들이 살아가는 장소에는 투자도 없고 공정한 배려도 없어 인구학적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경제적 순환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읍·면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경제권’이 붕괴하는 과정은 농촌 내부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국 사회가 농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외면한 결과다.
  사람들이 본인도 모르는 새 드러내는 무지無知한 언사에 놀라거나 헛웃음이 나오는 경험은 흔하다. 가령, 연매출액 수천억 원인 대형 생협의 이사가 농촌에 와서 훌쩍 자란 생강 포기를 보면서 “생강 열매가 왜 안 보이나요?”라고 물을 때, 그 말을 들은 농민들의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으리라. (지금, 농민이 왜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인지 도대체 감이 오지 않는 독자가 있을 테다.) 몇 년 전, 농촌 대중교통 문제가 부각된 적이 있다. 그 무렵 중앙정부 부처 공무원이 “시골에서는 카카오택시를 잘 활용하면 될 텐데요”라고 말하는 면전面前에서, 나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농민·농업·농촌에 대한 대중의 무지가 근본 문제라는 게 아니다. 그건 너무 쉬운 진단이다. 어느 토론회에서 대중교통, 보건의료, 상업 서비스 등등 여러 측면에서 힘겨운 농촌 현실을 사례를 들어가며 묘사한 적이 있다. 쉬는 시간에 교수님 한 분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나는 김 박사에게 한 가지 조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농촌의 안 좋은 모습을 너무 부각하면, 일반 국민들이나 정책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농촌에 신경 쓰고 투자해야 한다’라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도시민의 관심을 끌려면 발언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식의 말씀에 내가 느낀 불편함의 정체를 두고 한동안 고민했다. 그 교수님이 ‘뭘 모르고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기미幾微를 보았기 때문에 불편했음을 깨달았다.
  맥락을 부분적으로 사상捨象하거나 왜곡하는 인식이나 태도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중 유명한 것 하나가 오리엔탈리즘이다. 사이드E. Said는 동양과 서양을 구별하는 인식론적 구별과 더불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려는 서양의 제도 및 스타일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4)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동양은 비합리적이고 서양은 합리적이다. 동양 사회에는 보편적 윤리 개념이 결여되어 있고 서양 사회에는 보편적 윤리가 확립되어 있다. 동양 사람은 이상한데, 서양 사람은정상적이다.” “조선은 봉건사회고 일본은 근대사회다. 조선인은 게으르고 불결하며 일본인은 근면하고 청결하다.” 더 확장하면, 도시/농촌의 분할 구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농촌 사람은 비합리적이고 도시 사람은 합리적이다. 농촌은 전근대 사회고 도시는 근대 사회다, 등등. 가히 ‘컨트리엔탈리즘Countryentalism’이라 부를 만하지 않을까?
  오래전 <개그콘서트>라는 TV 프로그램에 ‘네가지’라는 코너가 있었다. 그 코너에서 촌에서 올라왔다는 개그맨은 도시 사람들의 편견을 공박한다. “내가 부모님 설 선물로 홍삼을 사러 갔는데, 점원이 날 보더니 ‘시골 사람들도 홍삼 사드세요?’하는 거야. 홍삼 키울 줄 몰라! 모른다고! 시골 사람이면 전부 무슨 설 선물하려고 홍삼을 6년이나 애지중지 키우는 줄 아냐고!” 하는 식이다. 도시민의 무지를 꼬집지만, ‘컨트리엔탈리즘’은 결코 전복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는 웃음으로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웃고 끝낼 수 없는 심각한 ‘컨트리엔탈리즘’이 농민·농업·농촌을 위기로 내몬다.
  대중의 무지와 ‘컨트리엔탈리즘’은 농민이나 농촌 주민을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는 정치적·제도적· 사회적 벡터Vector를 강화한다. 허버트 조지 웰즈H. G. Wells의 소설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에서 주인공은 투명해지는 약을 개발하지만 투명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결국, 투명인간은 비극적으로 죽는다.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면 살 수 없고, 인정받으려면 남들이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시성可示性은 생존의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농촌에는 투명인간이 아주 많다.

1) 원톄쥔, 《여덟 번의 위기 : 현대 중국의 경험과 도전, 1949-2009》, 김진공 옮김, 돌베개, 2016, 344쪽.
2) 물가상승률을 고려한 실질가치로 따진다면 정체가 아니라 하락했다고 보아야 한다.
3)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59쪽.
4) 에드워드 W.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2015.

필자사진(김정섭)필자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마을학회 일소공도’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화두 삼아 공부한다. 적게 먹고, 삼천 권의 책을 읽고, 산책하며 살고 싶지만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며 산다. jskkjs@kre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