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별 지구에서 가장 많은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곳

류근모 장안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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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따라 논두렁길을 굽이굽이 지날 때만 해도 기대하지 못했다. 그 길의 끝에 이렇게 멀쩡한(?) 식당이 있을 것이라는. 단정하고 견고해 보이는 2층 건물,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 벽면 하나를 꽉 채운 수만 개의 LP 판, 그리고 그것들에 둘러싸인 탄노이 스피커의 위엄. 도심 한복판에 옮겨놔도 손색이 없다.
따뜻한 보이차를 손에 들고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았다. 식당 안은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차례로 놓였다. 갖가지 쌈채소를 담아놓은 접시는 예쁜 꽃수반 같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분주하고 널찍한 주차장도 번잡해졌다.
3월 중순, 아직 쌀쌀한 월요일 농촌 식당의 풍경은 낯설고 또 흥미로웠다.

장안농장 채식 뷔페. 100여 가지의 유기농 채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이다.

17년 준비, 자랑이 되는 식당을 열다
충북 충주시 신니면에 있는 ‘장안농장 채식 뷔페’. 쌈채소로 100억 원매출 신화를 이룬 ‘상추 CEO’ 류근모 씨(제15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처음 농장 안에 식당을 열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가 극심했다. ‘이런 시골에 누가 온다고’, ‘수안보도 거의 망했고 주변에 관광지라고는 없는데’…. 그런데 개장한지 1년 된 지금,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예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다. 볼 것 없는 ‘시골’로 매일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주변에 관광지도 없는 시골 식당은 주말 예약이 힘들 정도로 인기다.

100여 가지 유기농 쌈채소와 브로콜리, 양배추쌈, 어린잎 샐러드, 아침에 만든 손두부와 맑은 순두부. 그리고 ‘제1회 대한민국 쌈장 및 된장찌개 선수권 대회’에서 1등한 ‘공식인증’ 쌈장이 있다. 콩고기는 매운 고추장 양념과 간장 양념 두 종류로맛있게 볶아 냈다. 마침 한 중년 남성이 돼지고기 맛있겠네, 하며 접시에 가득 담다가 콩고기라 쓰인 안내판을 발견하고 멋쩍게 웃었다. 채식 뷔페인줄 알고 오지만 그렇게 깜빡 속는(?) 손님이 심심치 않게 있다고 했다.
워낙 농업계 최초, 1등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 류근모 대표라, 그 이력에 또 하나를 보탰구나,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식당을 준비한 시간은 무려 17년이다.
“세계에서 채소를 가장 다양하게 먹는 사람이 바로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채식 식당이 없어요. 1만 원대로 유기농 채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당, 주방장이 없어도 되는 단순한 메뉴지만, 이곳에 와서 밥을 먹었다는 것이 의미와 자랑이 되는 명소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죠. 17년 동안 구상하고 준비한 겁니다.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에요.”

쌈채소 축제를 준비하는 모종들. 손길이 닿을 때마다 더 또렷이 살아난다. 류근모 씨는 모종은 시련이 있어야 강해진다고 말한다.

땅을 섬기는 것이 순리다
식당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비닐하우스에는 갖가지 건강한 채소가 자란다. 이 건강한 채소를 자라게 해주는 퇴비는 조금 떨어진 퇴비장에서 숙성되고, 퇴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와 돼지들은 지척에서 유기농 채소를 먹고 산다. 이 물질순환 생태농업이 그가 말하는 ‘순리’다.
순리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땅을 쉬게하고 보리, 호밀 같은 녹비작물을 심어 땅심을 길러준다. 그렇게 생산한 장안농장 상추는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대한민국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995년 열명의 농부로 시작한 장안농장의 협력농장은 현재 150여 개. 류 대표는 올해부터 유기농 퇴비 20kg 1만 포를 만들어 이들 협력농장에 공급한다. 앞으로 그들이 직접 유기축산을 하도록 적극 도울 것이다. 1프로의 차이를 만드는 생태순환농업의 완성을 위한 일이므로.

오전에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꾸러미’
2015년 3월 17일, 장안 농장 설립 20주년을 맞으며 류근모 씨는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고 회상 한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꺼낸 자랑은 농업인 최초로 받은 금탑산업훈장도, 14쇄를 찍은 <상추CEO>도 아니라, 20년간 150명 직원의 월급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직원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을 졸여요. 농업은 다른 산업과 달라서 큰돈이 안 되거든요. 죽기 살기로 아끼고 해야 간신히 조금 남죠.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노력이 순식간에 날아갈 수도 있어요. 선진국에선 농업이 ‘돈 되는 산업’이 아니라고 다들 인정해요. 그래도 중요하니까 배려하는 거죠. 우리나라에선 농업에 다른 산업과 똑같은 잣대를 댑니다. 가끔, 150명 이상을 고용하는 농업회사가 또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생태순환농업으로 만든 유기농 퇴비. 올해부터 150개 협력농장에 공급한다.

농업에 대한 제도적, 현실적 배려가 아쉽다는 류 대표지만, 요즘 직원 채용을 계속 늘리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상추를 택배로 배달해 농업 유통에 혁신을 일으켰던 그가, 모바일 시대를 겨냥 한 또 다른 준비를 하는 것.
“스마트폰으로 오전 11시에 꾸러미를 주문하면, 그 다음날 새벽에 문 앞에서 받을 수 있게 하는 거죠. 지금의 절반 가격에 좋은 품질의 채소를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거예요. 채식 뷔페의 콩고기도 볶기만 하면 되도록, 아주 간편하게.” 

20년간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 온 류근모 대표는 이제 농산물 유통 분야의 또 한 번의 혁신을 준비 중이다.

온라인 친환경 시장 80%를 점유한다는 목표로 유통센터 물류 자동화 설비도 다 마쳤다. 곧 농업 유통 혁명이라 부를 만큼 놀라운 일이 또 한 번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자신했다. 그리고 이것은 생산 기반이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농업은 지금까지 20년보다 앞으로 2~3년 동안 더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생산하지 않고) 농산물 유통만 하는 업체들이 대형유통에 밀려 고전하고 있어요. 장안 농장은 생산 기반이 큰 힘이에요.”

1851년 3월 17일 아침, 류 대표의 선조 류제완 선생은 ‘과채재배법’을 탈고했다. ‘걸어두지 말고 쓰 고 공부하며 널리 알리라’는 가르침. 2015년 3월, 류근모 씨는 선한 밭에 심은 상추를 살피며, 164년 전 선조의 가르침을 새긴다. 세상은 다시, 봄이다.

신수경 / 사진 김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