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100%로 국내에서 직접 만든 콩기름.”
얼마 전까지 거의 모든 대형마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한 식품업체의 식용유 제품에 쓰인 문구다. 내 몸을 지키는 건강한 습관, 해당 제품의 뒷면을 확인해본다. 다시 이런 문구가 나타난다.
“원재료명 및 함량: 콩 100%(대두, 수입산)”
참 불친절한 원재료 표기다. 원재료 표시와 제품 설명을 종합하면, 해당 제품은 수입산 대두를 국내에 들여와 짠 콩기름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콩기름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는 콩은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건너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대다수 식품업계 전문가와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해당 제품이유전자변형 대두, 곧 GMO를 원료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이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그냥 ‘유전자변형생물체’다. 따라서 공공기관이나 언론 등에서는 GMO를 가리킬 때, 꼬박꼬박 유전자변형생물체라는 용어를 쓴다. 반면 많은 환경단체와 소비자단체는 기표와 기의 간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유전자변형생물체’보다 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유전자조작식품’이라는 표현을 여전히 많이 쓴다.(물론 이는 그 대상이 ‘식품’일 때에만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GMO 수입량 1,000만 톤, 식용 21% 현행 제도로 가려낼 수 없어
콩이나 옥수수 등이 지닌 특정 유전자에 화학적 변화를 가해 뭔가 다른 형질의 작물을 만들어냈 다면, 그게 ‘조작’이든 ‘변형’이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제도나 법률을 직접 다루는 이들이나 단어 하나에 따라 매출액이 크게 오르내린다고 믿는 식품업계 관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으로 보인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2014년 4월 ‘유전자변형식품등의 표시기준’을 제정고시하고 ‘유전자조작’이나 ‘유전자재조합’이라는 표현 대신 ‘유전자변형’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했다. 유전자조작식품의 자리를 유전자변형생물체가 파고든 사이, GMO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도 많아졌다. 지난해 GMO 수입량은 처음으로 1,000만 톤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21%인 228만 톤이 식용이다. 총 수입량이나 식용 GMO 수입량 모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 안전성 정보센터가 관련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8년이후 최대 규모다. 이렇게 수입된 식용 GMO의 대부분은 옥수수와 콩이 차지한다. 옥수수는 감미료의 일종인 전분당, 콩은 앞서 소개한 콩기름(식용유)의 주된 원료로 쓰인다.
카놀라도 일정량 수입되는데, 콩과 마찬가지로 식용유를 만들기위해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빵이나 과자, 음식을 만들 때 자주 쓰이는 식용유 등을 통해 우리는 지금도 GMO를 먹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으면서도 그 존재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GMO와 관련 해 우리 국민이 직면한 핵심 문제다. 자신이 먹는 식품에 유전자변형 콩이나 옥수수가 들어있는지,현행 GMO 표시제도로는 가려낼 방법이 없다.
물론 ‘GMO가 인체에 유해하다고 입증된 것도 아닌데, GMO 표시는 반드시 할 필요가 있나’라는 반론도 있다. 많은 식품업계 관계자가 ‘현실론’을 들어 소비자와 언론의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GMO가 아닌 일반 작물Non-GMO의 재배 면적이 크게 줄어 구매 자체가 어렵다는 항변이다.
국내 한 대형 식품업체의 관계자는 “일반 옥수수나 콩을 구매하려 해도 방법이 별로 없고, 설령 어렵게 구한다 해도 이걸 원료로 제품을 만들면 소비자가격은 크게 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는 “위해성 여부와 관계없이 GMO에 대한 일반 소비자의 인식이 워낙 좋지 않아,제품에 꼬박꼬박 GMO 표시를 한다면 매출액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토로했다.
위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 안정성도 입증되지 않아
먼저 ‘GMO 위해성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안전하)다’는 논리는 반만 맞다고 할 수 있다. GMO의 인체 위해성이 구체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안전성이 입증된 적도 없다.
하나의 예로 GMO 위해성 연구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프랑스 캉대학 세랄리니 교수 연구팀은 2012년 유전자변형 옥수수를 2년 동안 먹은 쥐에서, 그렇지 않은 쥐보다 종양이 더 많이 발견됐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다국적 곡물 회사 등을 중심으로 거센 반격이 제기됐다. 결국 세랄리니 교수의 논문을 실은 학술지 편집위원장은 이듬해인 2013년 11월 “실험 데이터가 부정확하거나 연구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논문의 결론이 확정적이지 않다”는 애매한 이유를 들어 논문 게재를 철회하고 말았다. 그 뒤 세랄리니 교수의 논문은 다른 학술지에 실렸지만, GMO와 관련한 연구결과는 대개 이런 운명을 겪는다. ‘GMO가 안전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와도, 거꾸로 ‘GMO는 안전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와도 안전성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지난해 말 영국 런던에서 출범한 ‘팩터 GMO’ 프로젝트(러시아와 유럽·미국의 과학자가 참여해 6,000마리의 실험용 쥐를 대상으로 2~3년에 걸쳐 유전자변형 작물을 먹인 뒤 결과를 관찰하는 2,500만 달러 규모의 대형 연구프로젝트)가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으면서도 그 존재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 로 GMO와 관련해 우리 국민이 직면한 핵심 문제다. 자신이 먹는 식품에 유전자 변형 콩이나 옥수수가 들어있는지, 현행 GMO 표시제도로는 가려낼 방법이 없다.
GMO 원료 써도 표시할 의무는 없는 ‘표시제’
식품업계가 내세우는 일종의 현실론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이는 ‘관련 업계의 입장’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행 GMO 표시제도는 소비자의 알 권리와 선택할 권리보다는 식품업계의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크게 반영돼 있다는 평가다. 우리가 시중에서 GMO 표시가 이뤄진 식품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이렇듯 GMO를 원료로 쓰고도 표시하지 않아도 되는 현행표시제도 탓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국은 한 해 200만 톤이 넘는 식용 옥수수와 콩을 수입하고있다. 일부 농업 분야 전문가는 식용 GMO만 따지면 한국이 수입량 세계 1위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한국의 GMO 표시제도가 허술하다고 지적하면 담당 부처인 식약처는 그렇지 않다고 강변한다. 되레 한국의 GMO 표시제도는 엄격한 편이란 게 이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식품위생법 제12조의 2(유전자재조합식품등의 표시) 등을 보면, 유전자재조합기술을 활용하여 재배, 육성된 농산물, 축산물, 수산물 등을 식품의 원재료로 하여 제조·가공한 식품 또는 식품첨가물을 사용하면 제품 용기나 포장에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유전자변형 식품’이나 ‘유전자변형 대두 포함 식품’이라고 표시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GMO 표시제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문제는 ‘단백 질 및 DNA’ 조항이다. 식품위생법에서는 유전자변형 작물을 가공한 식품이라도 최종 제품에서 유전자변형 작물의 단백질이나 유전자가 검출되지 않으면 GMO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있다. GMO 성분을 검출하려면 유전자변형 단백질이나 유전자 정보를 파악해야 하는데, 둘 다 없다면 GMO 여부를 가려내고 싶어도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 논리다. 공교롭게도 유전자변형 콩이나 옥수수를 들여오는 국내 식품업체는 이들 작물에서 주로 기름을 짜거나 물엿, 당을 뽑아낸다. 당연히 단백질이나 DNA 성분이 나올리 없다. 이와 별도로 ‘주요 원재료’ 개념도 GMO 표시제도의 허점으로 꼽힌다. 제품에 많이 사용한 원재료중 GMO가 상위 5가지 안에 들지 않으면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이다.
국민은 ‘명확한’ GMO 표시제를 원한다
GMO 표시제도에 대한 국민의 요구 수준은 높은 편이다. 앞서 소개한 바이오 안전성 정보센터는 해마다 한 번씩 GMO에 관한 인식조사를 벌이는데, GMO 표시를 요구하는 응답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86~89%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GMO를 썼으면 썼다고 말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GMO 표시제도 강화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자 식약처는 올 초 유전자변형 식품의 표시대상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5가지 주요 원재료에 속하지 않아도 GMO를 원료로 썼다면 함량과 관계없이 함유 여부를 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단백질이나 DNA 검출 여부나 함량 등을 굳이 따지지 말자는, 곧 GMO 완전표시제 요구가 늘자 일정하게 여론을 수렴한 모양새다. 다만 식약처의 GMO 표시 대상 확대 발표에도 여전히 한계는 많다. 먼저 많은 소비자단체가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꼽는 단백질 및 DNA 조항이 남는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GMO 표시대상을 넓히려면 식품위생법 등을 고쳐야 하는데, 이것도 올해 안에 가능할지 불투명하다. 이에 대해 식약처 관계자는 최근 “유전자변형 식품의 표시대상을 확대하는 문제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관련 개정안의 통과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참고로 현재 국회에는 GMO 완전표시제와 관련해 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식품위생법 개정안 등이 제출돼 3년째 잠자고 있다. 주요 원재료의 함량이나 단백질·DNA의 잔류 여부와 관계없이 GMO를 사용했으면 반드시 표시하자는 게홍 의원 개정안의 핵심 내용이다.
※필자 최성진: 한겨레 사회정책부 기자. 2012년 제22회 민주언론상 보도부문 특별상을 받았다.보건복지부를 출입하며 모든 국민의 건강한 삶과 편안한 노후를 앞장서서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의 노후대책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