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농업의 지속 가능성, ‘사람’에 있다

여성 농업인 리더십 계발 연수에 참가한 여성 농민들과 함께
여성 농업인 리더십 계발 연수에 참가한 여성 농민들과 함께

지난해 11월 7~16일 열흘간 여성 농민 16명과 함께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농업 강국’ 뉴질랜드 농업의 현황과 협력체계, 경쟁력을 돌아보면서, 여성 농민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이번 연수의 주목적이었다.

남반구인 뉴질랜드의 11월은 봄이다. 뉴질랜드의 봄 날씨는 우리나라처럼 변화무쌍했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뉴질랜드는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대표적인 청정국가로 꼽힌다. 광활한 초원에 소와 양이 편안하고 여유롭게 풀을 뜯는 모습은 한 편의 그림이다. 뉴질랜드의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2.7배로 넓지만 인구는 10분의 1 수준이다. 나무를 심으면 3~4년 만에 6~7미터로 자랄 정도로 토양도 비옥하다. 뉴질랜드의 농업은 낙농을 말한다.우리의 논농사는 거의 없고, 밭농사는 원예산업으로 구분된다. 뉴질랜드 국내총생산 가운데 농업(가공부문 포함) 비중은 8%가량이다. 수출액에서는 농업이 65%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은 뉴질랜드 국민경제의 근간산업인 셈이다.
연구개발 관련해 식물·식품연구소Plant and Food Research와 푸드보울 농식품혁신센터New Zealand Food Innovation Network, 협동조합 분야에선 키위선과협동조합인 이스트팩, 농민조직으로 영파머스협회, 농업의 새 가능성을 보여주는 팜스테이와 관광 농업지로 체리·키위·낙농 농장 등을 두루 둘러봤다.

식물·식품연구소는 농민조직과 원활한 협력을 통해 뉴질랜드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식물 · 식품연구소는 농민조직과 원활한 협력을 통해 뉴질랜드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식물 · 식품연구소 _ 뉴질랜드 최고 농업연구소
식물 · 식품 연구소는 뉴질랜드 남섬에서 가장 큰 도시 크라이스트처치 외곽에 있었다. 연구소를 둘러보면서 연구결과를 알리는 일에 참 적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연구소 복도 곳곳에 연구원들의 요약보고서를 큰 패널로 벽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연수단에 연구소를 소개해 준 트래시 윌리엄스 연구원 역시 식물 · 식품연구소의 연구 결과물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업무를 맡고 있다. 식물 · 식품연구소는 2008년 12월, 식량(곡물)과 원예 연구기관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 분야의 뉴질랜드 최고 연구기관이다. 정부가 100% 지분을 가진 공공연구기관으로 주식회사 형태로 꾸려지고 있다. 연간 예산은 1억 뉴질랜드달러(800억 원)이다. 예산의 70%가량은 정부가 대고, 나머지는 자조금의 연구비, 신품종 로열티 등으로 조달하고 있다. 연구소는 뉴질랜드 전역에 15곳의 사무소를 두고 활동한다. 전체 직원은 900명이고 이 가운데 70% 이상이 연구원들이다.
식물 · 식품연구소의 주요 연구분야는 육종, 작물보호, 식품개발 등이다. 육종분야에서는 토양, 기 후에 적합한 종자를 개발하고 있다. 작물보호분야는 친환경 방제와 병해충 예방 연구에 주력한다. 식품개발분야에서는 화학 농약을 적게 쓰면서 고부가가치 식품을 만들어내는 연구를 진행하며 특히 지속 가능한 수산식품생산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수생들은 지적재산권과 식품개발 분야에 관련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의 질문에는 다국적 기업의 육종특허권으로 식량 주권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우리 농업 현실에 대한 우려와 뉴질랜드에 대한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식물 · 식품연구소에서 우리는 한국인 연구원 박계청 박사를 만났다. 박계청 박사는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곤충연구에 매진해 오다 7년 전부터 식물·식품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곤충 후각을 이용해 식물의 병해충 방지를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 있다. 박계청 박사는 “농민조직, 연구소, 정부의 원활한 협력체계가 뉴질랜드 농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병충해 등 사전 예방은 물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을 위한 협력이 잘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년 전 골드키위 병충해로 로열티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을 때, 3년 동안 정부, 연구자, 생산자 등이 대처방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했고, 저항성 품종, 방제대책 등을 찾아 보급했다고 한다. 이런 협력의 결과, 골드키위 로열티는 병충해 발생 이전 수준으로 빠르게 회복되었다고 한다.
박계청 박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농민 조직 안에도 전문가가 있어 정부, 연구기관과 논의할 때 농민 입장에서 꼼꼼하게 준비해 와 문제 해결에 농민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이다. 또한 자조금이 연구비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도 행정비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드보울 농식품혁신센터. 농민과 농기업의 경제적 부담과 위험성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푸드보울 농식품혁신센터. 농민과 농기업의 경제적 부담과 위험성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푸드보울 농식품혁신센터 _ 농민의 편에서 식품가공을 생각하다
뉴질랜드 농업에선 최근 식품 원자재로 혁신적인 농식품을 만드는 데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푸드보울 농식품혁신센터는 이런 흐름에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센터는 농식품 관련 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 가공과정을 거쳐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게 하려고 2011년 설립됐다. 농민, 농업 관련 기업 아이디어를 산업화하고, 수출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기 위해 중앙과 지방정부가 협력해 공동의 실험실과 공장을 건립한 것이다.
센터의 시설은 여느 가공시설과 비슷했다. 8억 원 상당의 독일제 멀티백Multiback 기계로 열이 아닌 압력으로 살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현재 600개 기업이 센터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센터를 이용 한 사업들에는 핫소스, 시리얼, 피넛버터, 건강식품, 수산식품, 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음식 등을 만드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포함되어 있다. 센터 안내를 맡은 앵거스 브라운 매니저는 식품가공과 관련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농업인이나 기업을 대상으로 상담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시설투자나 생산과정에서의 시행착오로 겪게 될 농민과 농업 관련 기업의 경제적 부담과 위험성을 줄이는데 이바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대기업들은 센터의 시설을 주로 테스트용으로 활용한다. 직접 설비 투자를 하기 전 사전실험용인 셈이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수산식품회사, 육가공회사 등이 이 센터를 이용해서 공정 효율화를 이루었다. 수출 대기업은 물론 농업인이 운영하는 10인 이하의 소기업도 적극적으로 센터이용에 참여하고 있으며, 뉴질랜드산 원자재를 사용하면 외국인도 센터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단다.

이스트팩은 900개 과수농가가 참여하는 키위 선과 협동조합으로 뉴질랜드 전역 7곳에 선과장을 갖추고 있다.
이스트팩은 900개 과수농가가 참여하는 키위 선과 협동조합으로 뉴질랜드 전역 7곳에 선과장을 갖추고 있다.

키위 선과 협동조합 이스트팩_ 뉴질랜드의 소통문화
협동조합은 뉴질랜드 농업 경쟁력의 비결로 꼽힌다. 키위 선과 협동조합인 이스트팩을 방문해 자넷 몽고메리 매니저와 제니 나튜스 조합 이사를 함께 만났다. 몽고메리 매니저는 선과장 운영에 대해 설명을 해 줬다. 이스트팩은 뉴질랜드 전역의 7곳에 과일 선과장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타우랑가에 있는 선과장은 2001년 문을 열었다. 연간 2천5백만 트레이(1트레이=3.6kg, 약 9만 톤)가량의 키위를 선별해 내는데, 바로 지난주에 일본 수출을 끝으로 올해 해외 수출은 모두 끝냈다고 한다.
선과장에는 선과 기계들이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몽고메리 매니저는 “키위는 대개 1등급만 수출하므로 품질관리를 엄격하게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1등급과 2등급은 20배나 값 차이가 나기 때문에 농가는 좋은 품질을 만들려는 경쟁이 대단하다고 한다. 선과장에서는 선과 결과 보고서를 농민들에게 매월 보내주고, 농민들로부터 선과장 이용료를 받는다.
나튜스 조합 이사는 뉴질랜드 키위산업 관련 협동조합에 대해 설명을 해 줬다. 이스트팩은 900개의 과수농가가 참여하는 협동조합으로 뉴질랜드 5대 협동조합 가운데 하나다. 최근 과거 과수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조합원 자격을 유지할 것인가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에게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키위협동조합으로 알려진 제스프리는 엄밀하게 말해 협동조합의 변형으로 주식회사라고 한다. 키위 수출 통로의 단일화를 위해 생산자들이 만든 영리기업이지만, 제스프리는 수익금 일부를 떼 자조금으로 내놓고, 신품종 육종 등에 사용되도록 한다. 제스프리를 단일수출 통로로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95%의 농가는 찬성하고, 5%의 농가는 경쟁하는 게 더 낫다며 반대하고 있다. 뉴질랜드 협동조합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이스트팩 방문에서 또 하나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뉴질랜드의 소통문화였다. 학교는 물론 기업 등 대부분 기관에서는 오전, 오후 10분씩의 짧은 간식 시간이 있다. 각자 준비해 온 과일, 스낵 등을 내놓고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눈다. 어릴 때부터 들인 소통의 습관은 사회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휴게실에 모여 차를 마시며 동료들과 서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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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파머스는 어린이들이 농업에 관심을 갖게하는 다양한 활동을 한다. (사진제공·뉴질랜드 영파머스)
영파머스는 어린이들이 농업에 관심을 갖게하는 다양한 활동을 한다.  (사진제공·뉴질랜드 영파머스)

뉴질랜드 영파머스 클럽 _ 농민 조직의 지속 가능성
뉴질랜드 농민조직들이 지속 가능성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애쉬버튼Ashburton에 있는 영파머스 남섬 사무소를 찾았다. 농민연합회 중앙 캔터베리지부와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 영파머스 남섬 대표인 테리 코프랜드Terry Copeland가 협회 활동을 소개했다.
1932년에 만들어진 영파머스협회 회원은 8~31세의 농업에 관심 있으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 다. 1960년대에는 회원 수가 1만 5,000명에 달할 정도로 활발했는데 이후 많이 줄었다고 한다. 현재 회원 수는 3,500명 정도이며 최근에는 다시 느는 추세다. 협회는 특히 어린 학생들이 농업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회원의 40%가량이 8~13세의 초등학생들이다. 14~18세의 청소년 회원들에게는 리더교육과 젊은 영농인의 교류, 농업 관련 취업 등을 도와준다.
협회의 대표적인 활동 가운데 1969년부터 시작한 영파머스 경진대회는 해마다 열려 올해 47회를 맞았다. 농업 기술 및 이론, 농산물 마케팅, 요리 등 20여 개 종목으로 치러진다. 협회는 경진대회를 열어 농민의 역할모델을 만들고 후원도 얻으며 방송홍보를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농업인을 키우고 농업기술 향상을 위한 협회의 지속적인 사업이다. 2014년 경진대회에서는 오클랜드의 한 은행원이 우승해 7만 5천 뉴질랜드달러의 상금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수생들은 협회의 도시회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심을 보였다. 도시회원들은 지역학교에 농업관련 교육자료를 제공하고 농장방문, 교환학생 등을 주선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영파머스 도시회원은 여러 형태의 활동을 하고 있다. 75개 동아리 클럽이 4개 대도시(오클랜드, 웰링턴, 해밀턴, 크라이스처치)에서 활동한다. 이 가운데 2개의 동아리는 농업과 무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참여해 도시에서의 농업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농촌에도 다양한 단체(청년 4h, 여성농민회, 농민회, 생활개선회, 후계자농민회, 자원봉사회)가 있지만 도시인들과의 연계는 거의 없는 점과 사뭇 비교됐다. 뉴질랜드는 도농 간의 소통 문제를 산업과 민간(영파머스)이 주도가 돼 자율성, 독립성을 지켜가며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 부럽기까지 했다.
테리 코프랜드 대표는 영파머스 회원이 2020년에는 1만 명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새 정부가 농 업을 성장동력으로 삼고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두 자리수로 키울 거로 기대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은퇴를 앞둔 농민 25만 명의 자리가 빌 예정이라, 앞으로 교육과 훈련으로 농업인력을 확보하는 데 협회가 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건강한 먹을거리를 직거래하는 농민시장도 뉴질랜드 농업의 지속성을 높이는데 한몫을 하고 있었다. 특히 농민, 지역민 등 민간이 스스로 운영위원회를 꾸려 민주적으로 꾸려간다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한겨레> 2014년 11월 23일 기사 참조)
열흘간의 뉴질랜드 연수에서 농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농민, 연구기관, 정부 등이 서로 협력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탐방기관에서 만난 대부분의 담당자가 여성들 이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뉴질랜드농업 경쟁력과 지속성은 자연적 조건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공평한 원칙, 효율적인 정부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연수는 한국 농업 특히 여성 농업인으로서 농업에 대한 희망을 찾는 기회가 되었다. 사는 지역과 하는 일은 다양하지만 여성 농민 리더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우리나라 농업이 갈 길에 대해 서로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뉴질랜드 여성 농업인들이 강조하는 상호 신뢰와 원칙 준수라는 부분은 우리 농업에서도 꼭 필요한 사회적 자본이며 여성 농업인의 강점이기도 하다. 한국 농촌의 지속 가능성은 여성 농민 리더들이 이끌어 갈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져본다.

98※필자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사회적경제와 사회책임경영 부문의 연구와 교육, 출판 등을 하면서 농업·농촌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농업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