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동무를 기다리며

김탁환

  피어나는 꽃을 시샘이라도 하는 걸까.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고 바람까지 거셌다. 봄을 맞아 독자들과 섬진강 들녘을 걸어보려고 준비했는데, 걱정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행사를 취소하진 않았다. 기온이 내려가도, 비가 오고 때론 우박이 쏟아지더라도, 신청한 독자들이 전라남도 곡성으로 내려오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약했으니 참여하겠다는 의사 표현이 아니라, 상황이 나쁘더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내가 계획한 산책이 아름답고 멋진 섬진강 꽃구경은 아니다. 길동무 삼아 함께 걸으려는 길은 지극히 평범하다. 강을 끼고 논농사를 짓는 마을이라면 어디서나 만날 법한 풍광이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던 마을과 벼농사를 지은 논과 배를 탔던 나루와 뛰놀던 버드나무 습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책에 이미 자세히 적어놓았지만, 독자들은 직접 그 공간에 머물려고 한다. 일종의 경험이다.

  등장인물처럼 걷고 일하고 놀고 마시면서, 활자가 아닌 삶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각종 불편을 감수한다. 참가비를 내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곡성까지 와야 한다. 마른 논흙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습지에서 썩은 나무들의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길 아닌 길을 걸어보기도 한다.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일을 감내하면서도, 짜증을 내거나 거절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경험을 작가가 왜 했는지 알려고 하고,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작품에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녹아 있는지 찾으려 한다. 이렇게 멋진 길동무들을 위해 서너 군데 장소를 미리 챙겨두었다.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그 공간이 등장하는 작품 속 문장들을 읽을 예정이다.

  도시와 농촌 사이엔 높고 단단한 벽이 있다. 농촌 사람들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많이 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도시 생활을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은 농촌의 삶을 거의 모른다. 현재 농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농촌 마을의 공식 모임과 비공식 모임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마을 사람끼리 소통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농촌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빛바랜 기억 속 농촌을 끄집어내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농촌은 그렇듯 애틋하고 따사롭고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각종 통계를 들이밀며 산과 강과 마을을 바꾸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숫자들로 농촌을 분석하려 들지 말고 우선 경험해보라 권하고 싶다. 가장 정직하면서도 분명한 길은 농촌으로 옮겨 일정 기간 살아보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활성화된 농촌 유학이 좋은 예다. 도시 어린이들이 전학 온 농촌 학교에서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보호자로 따라온 부모들도 비로소 농촌의 현실과 맞닥뜨린다. 단기간이라도 농촌 이주가 어렵다면, 농촌을 충분히 경험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차선책도 있다. 논밭 농사를 직접 짓는 체험에서부터 농촌 문화를 함께 만들고 즐기는 체험까지 다양하다.

  습작 시절, 선배 작가로부터 이런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작품의 수준과 무관하게, 과정을 겪지 않고는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세상을 경험해서 오감으로 느끼도록 애쓰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글감의 곁으로 가라고 한다. 한 번만 가지 말고, 계절과 날씨를 다르게 하여 적어도 열 번은 가라고 한다. 곁으로 가서 낯선 대상을 품으려 분투하는 나날의 가치는 글쓰기에만 적용되진 않을 것이다.

  경험의 멸종이 논의되는 시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해온 경험을 AI에게 대부분 넘긴 채 곧장 결과에 닿는 시절이다. 경험이 줄어들수록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도 있다. 과연 그런가. 곁으로 가는 건 더디고 힘들고 불편하며 외로운 과정이다. 이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궁리하며 실천하는 나날이 나를 더욱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섬진강 들녘으로 오늘 내려올 길동무들의 마음도 그와 같았으면 싶다.

필자 김탁환: 소설가
소설가,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 책방지기. <섬진강마을영화제> 공동운영위원장. 대표작으로 <사랑과 혁명>, <참 좋았더라>, <불멸의 이순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