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 쌀 정책과 수입 쌀 ‘완판’의 비밀

혼합 쌀 이야기가 나온 것은 지난봄, 평소 알고 지내던 농업 관련 연구자와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쌀 관세화 전망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에 식사가 나오자 그 연구자는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어쩌면 이것도 혼합 쌀로 지은 밥일지 몰라요.” 나는 물었다. “혼합 쌀? 그러니까 묵은쌀과 햅쌀을 섞은 것 말인가요?” “아뇨. 수입 쌀과 국산 쌀을 섞은 거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식당 내부를 둘러봤다. 벽에 붙은 메뉴판에는 ‘쌀과 김치가 모두 국산’이라고 표기돼 있었다. “저기엔 국산이라고 쓰여 있네요. 그럼 원산지를 거짓 표시했다는 이야긴가요?” 그러자 상대는 난감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식당 주인 중에도 자기가 수입 쌀과 국산 쌀을 섞은 혼합 쌀을 쓰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쌀 포대에는 국산 상표인 것처럼 표기돼 있거든요.” “국산 상표처럼요? 그렇게 하면 불법 아닌가요?” “아뇨. 수입 쌀과 국산 쌀을 섞는 것도, 그 혼합 쌀에 국산 상표를 붙이는 것도 다 합법이에요. 문제 될 게 없어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게 다 합법이라고?’ 혼합 쌀 문제를 한번 추적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때부터였다.

미국산 95%짜리 쌀이, 이천 쌀인 것처럼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이미 농민 단체나 소비자 단체에서는 혼합 쌀 문제를 심각한 이슈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올해 들어 수입 쌀과 국산 쌀의 혼합 금지를 촉구하는 거리시위와 홍보전도 계속 벌이고 있던 차였다. 명색이 기자라는 이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일단 혼합 쌀 문제를 맨 처음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 여주군 농민회로 연락을 해보았다. 이곳에서도 혼합 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올 초 최재관 여주군농민회 교육부장이 한 회원으로부터 제보 전화를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경기도 이천 인근 국도를 지나다 한읍내 슈퍼마켓을 들르게 됐다는 그 회원은 매장에서 파는 쌀들을 훑어보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쌀 포대 겉면에 ‘기찬○○쌀’이라는 상표가 크게 쓰여 있고 그 밑에 ‘이천△산’이라는 상호가 표시돼 있기에 ‘이천△산? 이천에 이런 데도 있었나?’ 하면서 쌀 포대 이곳저곳을 살펴봤더니 포대 한 귀퉁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원산지: 국산 찹쌀 5%, 칼로스(미국) 95%’라 적혀 있더라는 것이다. 이천△산이라는 곳 또한 경기도 이천과는 무관하게 서울 양재동이라고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런 걸 꼼꼼히 확인하지 못한 채 ‘기찬○○쌀’, ‘이천△산’이라는 상표명과 상호만 본 사람들은 영락없이 이를 국산 쌀로 오인할 상황이었다.
“미국산 95%짜리 쌀이 이천 쌀인 것처럼 팔린다니 말이 돼요?” 흥분하는 회원의 전화를 끊고 최재관 부장은 곧바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동네 저 동네 슈퍼마켓을 뒤지고, 회원들에게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제보를 부탁했다. 취합된 결과는 놀라웠다. ‘기찬○○쌀’ 하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청○미’, ‘미소△’, ‘농부의 □작’ 따위 우리말 이름을 단 혼합 쌀이 이미 시중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미국산 90%+국산 10%’, ‘중국산 80%+국산 20%’, ‘미국산 50%+중국산 50%’등으로 배합 비율도 다양한 혼합 쌀들이었다.

혼합 쌀은 이미 시중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다.

그 많은 밥쌀용 수입 쌀은 어디로 갔을까?

쌀을 그나마 안다는 농민들도 이처럼 속아왔을 지경이었을진대 소비자는 오죽할까?일단은 주변사람, 특히 살림하는 주부들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혼합 쌀이 뭔지 아느냐고. 한결같이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기자처럼 ‘묵은쌀과 햅쌀을 섞은 것 아니냐’, ‘품종을 섞은 것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도 꽤 많았다(이것들도 혼합 쌀로 분류되는 것은 맞다).
알고 보니 슈퍼마켓뿐 아니라 도시 소비자들이 애용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혼합 쌀은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이들 쇼핑몰에서도 쌀 품종과 원산지는 따로 표시하게끔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정보를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 소비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중국산 백미 95%와 미국산 백미 5%를 섞은 한 혼합 쌀은 유명 쇼핑몰에서 팔려나가고 있었다. 쌀 상표는 ‘미소○’. 역시나, 이름만 봐서는 혼합 쌀인 줄 알기 어렵다. 실제로 이 쌀을 구매한 소비자 중에는 “집에 배달된 쌀 포대에 붙은 라벨을 보고 수입 쌀이 섞인 줄 알았네요. 제대로 확인 못한 내 잘못도 있지만 왠지 속은 듯해 기분이 나쁘네요.” 같은 구매 후기를 남긴 이도 있었다.

이쯤 되니 혼합 쌀이 이런 식으로 얼마나 유통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농림축산식품부나 산하 연구원, 일반농민 단체까지 수소문해 봐도 혼합 쌀 유통 실태는 한 번도 조사한 일이 없다는 응답만이 되돌아왔다. 다만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수입 쌀 불법유통 실태 조사를 토대로, 수입 쌀을 부정 유통한 건수와 물량이 해마다 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수입 쌀을 국내산으로속이거나 원산지 표시를 하지 않아 적발된 건수가 2010년 18건에서 2011년 131건, 2012년 372건으로 급증하고 있었다. 이들이 부정하게 유통한 물량 또한 2010년 22ton에서 2012년 3,488ton 규모로 폭증한 상태였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수입 쌀이 잘 팔리지 않는 바람에 재고가 남아돌아 문제라고 주장해왔다. 이는 사실일까?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한국은 매년 일정량 이상의 쌀을 수입하는 중이다(이를 의무도입물량또는 최소시장접근물량이라 부른다). 이렇게 수입하는 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가공용 쌀과 밥쌀용 쌀이 그것이다. 가공용 쌀은 막걸리나 인스턴트 밥, 쌀국수 같은 가공식품을 만드는 데 쓰이고, 밥쌀용 쌀은 말 그대로 우리 밥상에 직접 오르는 쌀이다. 혼합 쌀에 쓰이는 쌀은 당연히 후자다. 그런 만큼 나는 농림축산식품부에 지난 5년간 수입한 쌀을 가공용 쌀과 밥쌀용 쌀로 나눠 각각의 판매량 및 재고 현황을 알려 달라 요청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지난 5년간 정부가 들여온 가공용 쌀은연간 22만~27만ton 수준이었는데 2010년 도입분은 573ton, 2011년 도입분은 1만 7천ton, 2012년도입분은 15만ton가량 재고가 남아 있었다. 반면 밥쌀용 쌀은 2010년 도입한 9만 8천ton과 2011년도입한 10만ton이 모두 팔려나간 것으로 집계돼 있었다. 2012년 도입한 11만ton 중에서도 남은 물량은 1%가 채 안 되는 908ton에 불과했다. 이쯤이면 사실상 매년 완판을 기록한 셈이었다.

양곡관리법 개정으로 가능해진 혼합 쌀, 우리 밥상을 점령
애초에 혼합 쌀이 가능해진 것은 2009년 10월 양곡관리법이 개정되면서다. 도입 당시만 해도 풍년으로 남아도는 국산 묵은쌀을 햅쌀과 섞어 쉽게 처리하게끔 하는 데 방점이 찍혔던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2011년 이후 국산 쌀 자급률이 100% 아래로 떨어지면서 수입 쌀 업자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이때부터 ‘국산 쌀+수입 쌀’이 본격적으로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일반 농민과 소비자가 뒤늦게 현실을 알게 된 것뿐이지 업자들은 이미 이러한 실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서울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미국 쌀이건 중국 쌀이건 지금은 갖다 놓기만 하면 금방 다 팔려나간다”고 말한다. 지난 4월 국회에서 열린 ‘쌀 불법유통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 참석한 박병오 한국유통협회 부회장 또한 떡집·분식집 등 서민층이 주로 이용하는 음식점을 중심으로 “혼합 쌀 수요가 이미 분명하게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누가 뭐래도 싼 가격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수입 쌀 평균가격이 국산 쌀의64.9%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에 가면 쌀 혼합기를 갖춰놓고 수입 쌀과 혼합 쌀을 즉석에서 섞어 파는 업체들 만날 수 있었는데, 이중 ㅅ업체 관계자는 “미국산 칼로스 90%에 국산찹쌀 10%를 섞으면 국산 쌀을 썼을 때와 밥맛이 거의 비슷하다”라며 이 쌀 도매가를 20kg당 3만 4천 원에 제시하기도 했다. 같은 용량의 국산 쌀 평균가보다 6~7천 원가량 싼 가격이다. 중국산 저가쌀을 90% 이상 섞어 쓸 경우 국산 쌀 절반 값에 혼합 쌀을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이윤을 추구하는상인들로서는 혹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식당에서 이런 쌀을 먹게 될 경우 소비자는 이것이 혼합 쌀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양곡도매시장의 한 업자는 “국산 찹쌀을 조금만 섞어도 밥맛이 차져지는 만큼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큰소리쳤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음식평론가나 요리사 또한 값싼 수입 쌀에 흑미를 섞거나 하면 밥맛이 감쪽같아져 일반인으로선 그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믿을 수 있는 정직한 쌀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농민은 농민대로 편법으로 유통되는 혼합 쌀 때문에 손해를 보고,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알 권리와 건강권을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국회에서도 수입 쌀과 국산쌀의 혼합을 금지하자는 법안이 제출됐지만, 이제껏 정부는 이 법안에 난색을 보여 왔다. ‘국산 쌀+국산 쌀’ 혼합까지 함께 금지하면 모를까, ‘국산 쌀+수입 쌀’에 대해서만 혼합을 금지하면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의 내국민 대우 조항에 어긋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농민 단체와 시민 단체의 비판이다. 대만은 이미 2~3년 전부터 여론 수렴과 법적 검토 절차를 밟은 결과 지난 5월 국산 쌀과 수입 쌀의 혼합을 금지하는 양식관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 정부 태도가 바뀐 것은 쌀 관세화가 본격화되면서다. 정부는 지난 7월 쌀 관세화를 전격 선언하면서 이에 따른 후속 대책 중 하나로 혼합 쌀 판매 금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최재관 부장은 “현장에서 아무리 혼합 쌀 문제를 제기해도 눈 하나 꿈쩍 않던 정부가 결국 관세화를 앞두고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당근’ 하나 던지듯 혼합 쌀 판매 금지를 거론하고 나온 셈”이라고 씁쓸해했다. 도시 소비자 또한 입맛이 쓰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그간 소비자를 위해, 그러니까 쌀값 조절을 통한 물가 안정을 위해 혼합 쌀을 허용해 온 것인 양 상황을 호도해 왔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과연 값싼 쌀일까,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쌀일까. 이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쌀 관세화 시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달라질지 모른다.

※필자 김은남: <시사IN> 사회팀 선임기자. 사회적 경제 분야를 취재하며 농업·농촌 문제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됐다. 요즘은 아들을 농부로 키울 방법은 없을까 궁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