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사라지지 않는다

얼마 전 한 케이블 방송에서 <농부가 사라졌다>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농업’을 주제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먹거리를 길러내는 농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내용이라는 기대로 작업장에서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시청했다.
다큐멘터리는 지금으로부터 6년 뒤인 2020년 한날한시에 대한민국의 모든 농부가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시작했다.
농부가 사라졌다니? 왜? 가상이기는 했지만 두려웠다.

태초에 인류는 농부였다.
만약 이 지구에서 인간의 삶이 끝이 있다면 마지막 인류 또한 농부일 것이다.
농부는 이 세상의 시작이고 끝이다.

쌀 관세화, 농민의 생존을 위협하다
지난 7월 18일 정부는 “쌀을 관세화하겠다” 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쌀 관세화라니? 무슨 말이
지? 일반 국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농민들에게는 특히, 벼농사로 평생을 살아온 나 같은 농민들에게는 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말이다.
‘쌀을 관세화하겠다’는 것은 쌀마저 다른 농산물처럼 완전히 수입 개방하겠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쌀은 다른 농산물과는 달리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수입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다른 농산물은 수입업자가 관세만 물면 수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지만, 쌀만은 수입 허가를 받아야만 국내로 들여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폐지하고 누구나 관세만 내면 자유롭게 수입을 할 수 있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쌀 수입 허가제를 폐지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관세화라고 어렵게 말한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전체 농가의 70%가 벼농사를 짓고 있다. 농업소득의 40%를 벼농사에
서 얻고 있다. 단일품목으로는 농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이 쌀
이다. 이런 쌀을 개방하겠다는 것은 농민에게는 농사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농
민에게 농사를 포기하라는 것은 삶의 미래를 포기하라는 것이고 자신을 포기하
라는 것이다.

공식발표 후 농민들의 투쟁은 극렬하다. 내가 활동하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은 삭발까지 했다. 여성으로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머리를 깎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농민단체의 대표로서 그렇게라도 여성 농민들의 투쟁 의지를,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전국의 농민들이 바쁜 농촌의 일손을 뒤로하고 서울로 모여 항의하고 정부의 태도를 규탄했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농민 단체, 소비자 단체, 시민 단체 등 50여 개가 넘는 단체들이 쌀 수입 개방을 반대하고철회하기 위해 모였지만 정부는 요새 안에라도 들어앉은 모양 메아리가 없다.
쌀마저 수입을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은 정부가 더는 한국의 농업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정부는 쌀 관세화율 513%로 쌀을 지킬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쌀을 지키는 길이 아니다. 관세화율은 다른 나라와의 협상 과정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깨질 수 있는 수치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의지가 있었다면 현재의 사태에 대해 농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였을 것이다. 국회를 찾아간 농민들을 검찰에 고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국의 농민들이 바쁜 농촌의 일손을 뒤로하고 쌀 시장 개방에 반대했다.

우리나라 전체 농가의 70%가 벼농사를 짓고, 농업소득의 40%를 벼농사에서 얻고 있다. 단일품목으로 농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이 쌀이다. 이런 쌀을 개방하겠다는 것은 농민에게는 농사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정부는 농민이 농사를포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농민에게 농사를 포기하라는 것은 삶의 미래를 포기하라는 것이고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과의 결별이다. 농민에게 농사란 경제적 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머니의 품처럼 자신을 지켜주었던 공동체와 분리되는 것이고 자신의 몸으로 연결되어 있던살아있는 땅과의 이별이다. 그런 피눈물을 정부는 쉽게 이야기한다. 경쟁이 안 되면 떠나라고.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3%이다. 이 중 쌀을 빼 버리면 5%밖에 되지 않는다. 예
전에 밀은 우리나라에서 100% 자급되는 품목이었다. 그나마 사라져 가는 밀을 지
키고자 했던 헌신적인 시민 단체와 몇몇 의식 있는 농부들의 노력으로 밀 씨앗을
지켜낸 것이지 정부의 정책대로라면 대한민국에서 밀 씨앗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
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쌀마저 그렇게 하려고 한다.

식량 자급률 23%도 쌀이 있어 가능하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이 23%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아는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호주, 독일, 덴마크 등 모든 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100%가 넘는다. 자국 내에서 생산하고, 소비하고도 남아 수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77%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23%의 식량 자급률 수치에는 쌀의 자급률 88%가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한다. 쌀을 빼 버리면 5%밖에 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식량 자급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쌀마저 내놓으려고 한다. 그러고도 국가의 역할과 주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예전에 밀은 우리나라에서 100% 자급되는 품목이었다. 그런데 지금 밀 자급률은 2%도 채 안 된
다. 나머지 98%는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밀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밥보다도 더 좋아한다는 빵, 국수, 피자 모두가 수입 밀로 만들어진다. 그나마 사라져 가는 밀을 지키고자 했던 헌신적인 시민 단체와 몇몇 의식 있는 농부들의 노력으로 밀씨앗을 지켜낸 것이지 정부의 정책대로라면 대한민국에서 밀 씨앗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먹을거리는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갔다. 이제 마지막 남은 쌀마저 그렇게 하려고 한다.

쌀 수입 개방 문제는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일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의 건강하 고 안전한 먹거리 확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 언니네텃밭 꾸러미 회원 소비자들을 만나면 쌀 수입 개방 문제가 농민들의 생존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의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 확보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률 23%는 국민들 자신의 먹을거리와 자신의 밥상과 자신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농민들을 지키겠다”고 격려를 해 준다.
정부도 농민들을 지켜주지 않는데 농민의 곁에서 든든하게 함께 해주겠다는 소비자들이 있다니 눈물이 날 만큼 고마운 일이다.

농부로부터 이 세상이 시작되었다
다른 들녘에서는 벼 베기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쌀 관세화 발표에 벌써 시중 쌀값이 요동치고 있다는 소식에 한숨짓는 농민이지만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그냥 볼 수만은 없는 것이 농민의 마음이다. 생산비가 나오든 안 나오든 이른 봄부터 싹을 내기 위해 나락을 고르고 아무것도 없던 빈 들판을 연둣빛 고운 모로 채우고 장맛비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키를 쭉쭉 뽑아 올리던 그 장한 벼를 내 품으로 거둬들여야 한다.
우리 동네는 아직 벼 베기가 시작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지금쯤부터 들녘이 들썩들썩했다. 언제 벼를 베면 좋을지 논을 둘러보기 위해 삽을 어깨에 멘 농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올해 작황은 어떤지? 쌀값이 오를 것인지 내릴 것인지? 서로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나누고 때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옳다고 핏대를 세우고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올해 수확한 쌀을 팔아서 딸아이 등록금 줄 생각에, 마누라 옷이라도 한 벌 사줄 생각에, 식구들 외식이라도 한 번 할 생각에 논을 둘러보는 농부의 가슴이 벌렁벌렁했을 것이다. 가을에 추수한 쌀은 일 년 동안 기다린 농부들의 기쁨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 올해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을 고요한 침묵만이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가을의 맑은 햇빛을 받아 황금보다 더 빛나는 논은 정갈해서 더 슬픈 것 같다. 그 모습이 나이고 내 이웃인가 보다.

그러나 다시 밥상을 차린다. 올해 추수한 윤기 흐르는 하얀 햅쌀로 다시 밥을 한다. 나도 앉고 너도앉고 우리 모두 같이 앉아 김이 펄펄 나는 하얀 햅쌀 고봉밥을 먹는다. 쌀은 사라지지 않는다. 쌀이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의 주인이었다. 농부는 사라지지 않는다. 농부로부터 이 세상은 시작되었다.

※필자 김정열: 언니네텃밭 단장. 경북 상주로 귀농해 24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농부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농부로 살아가는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며 꾸러미 사업을 비롯해 소비자와 소통하며 여성 농민으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