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에서 사는 양 ‘양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양양이는 겁 많은 새끼가 행여 무서워할까 파릇파릇 먹을 것이 지천으로 깔린 초원을 마다하고 보금자리만 지킨다. 이들 옆집엔 닭과 토끼가 함
께 산다. 목장 초입에는 기러기와 오리가 짝을 이뤄 요란스럽게 손님을 맞이하고, 당근은 그렇다 치고 양배추에 사족을 못 쓰는 안방마님 말 벨라, 한때는 버려졌었지만 지금은 초록 잔디 위를 마음껏 달리는 ‘선택 받은’ 개들…. 여든다섯 마리의 건강한 소와 다양한 동물, 풀꽃, 나무가 와글와글한 은아 목장에 다시, 봄이 왔다.
목장이 관광 상품으로
예전 우사를 고쳐 만든 체험장에서는 때마침 아이스크림 만들기가 한창이다. 홍콩에서 온 관광객들은 조옥향 대표(61, 제11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의 설명에 따라 큰 볼에 얼음과 소금을 넣고 그 위에 작은 볼을 겹친 뒤 우유를 넣고 일정한 속도로 부지런히 저어준다. 처음엔 거품만 일어나고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서서히 아이스크림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감탄하고, 맛을 보고 나면 더 큰 감동으로 시끌시끌하다.
아이스크림 만들기는 아주 초보적이고 가벼운 체험이다. 은아 목장에서는 치즈 장인이 만들어주는 갖가지 치즈, 목장 우유로 만드는 버터와 밀크소시지, 그리고 건강함이 듬뿍 들어있는 피자 등 다양한 유가공 체험과 소를 알 수 있는 낙농체험을 한다. 여기에 조 대표 가족이 직접 만들어놓은 아기자기한 벽화와 소품들, 그리고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다.
올해로 12년 차인 은아목장 체험. 매년 1만 명 이상이 목장을 찾고, 국내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 동남아시아 관광객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가 높다.
“농민이 치즈, 버터를 만들 수 있게 하라”
이러한 변화는 12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2000년대 초 ‘원유 파동’으로 정부 정책이 증산에서 감산으로 바뀌고 쿼터제가 도입됐다. 이 제도로 일정한 양 이상의 우유를 납품할 수 없게 되자 농민은 남는 우유를 버리고 소를 강제로 도태시킬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만드는 데 25년 걸린 우유 쿼터제가 우리나라에선 단 6개월 만에 시행됐으니 정부도 학자도 농민도 우왕좌왕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때 목장체험과 유가공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어요.”
버터, 치즈,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을 개발해서 남는 우유의 부가가치를 높여보자. 유럽 알프스 지역 연수를 다녀와서 유가공에 대한 그의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목장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 이것이 체험목장의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관련 부처를 찾아다니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머리에 띠를 두르지 않고 차분한 대화로 농민의 어려움을 공감하게 하고 정책을 이끌어 냈다. 그때 함께 했던 공무원들은 그녀를 ‘참 가슴 짠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농민’이었다고 말한다.
“농림부에 농민이 버터, 요구르트, 치즈를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또 목장을 공원처럼 만들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목장 만들기가 시작되고, 또 농가 유가공이 허가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유가공을 하겠다는 농가들이 모여 연구회도 만들고 정책도 제안했다. 12년간 농가 유가공을 하는 목장은 73개로 늘어났다. 우유만 짜서 납품하는 ‘집유업’에 그치던 낙농업을 생각하면 참, 놀라운 일이다.
대를 잇는 농업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은아 목장의 새로운 볼거리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조옥향 대표는 남편 김상덕(64) 씨, 큰딸 지은 (30) 씨, 작은딸 지아(29) 씨, 그리고 이제는 두 딸의 아이들까지 3대가 함께 목장을 꾸려 나간다.
낙농체험과 소 관리는 김상덕 씨가, 그리고 치즈를 비롯한 유가공 관련 책임은 조 대표가, 프랑스 제과학교에서 제과 제빵을 공부한 지은 씨는 아이스크림과 버터, 쿠키체험을, 여주농고를 나와 일본에서 식품과학을 전공한 지아 씨는 치즈와 소시지, 피자 체험을 돕는다.
“유럽이나 호주에서 농촌 여성이 사는 모습을 보며 참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절 부러워하시는 분도 많아요. 예전에는 딸들이 참 착하네, 농촌에서 엄마도 돕고…. 했는데 요즘에는 엄마를 잘 둬서 좋겠다고 해요. 불과 5년 사이에 그렇게 (생각들이) 많이 변했답니다.”
조 대표가 낙농을 시작한 30년 전엔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여성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사회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딸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아직도 골라낼 돌들이 많고 넘어야 할 산이 높다고 느낀다.
“우리 딸들은 여성농업인으로서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요. 엄마로 여자로 사는 삶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이 지속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따뜻한 리더십, 지역 농업과 손을 잡다
봄이 되면서, 목장엔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작년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뒤 관광객들은
더 많아졌다. 올해 외국인 관광객수가 더 많이 늘어날 전망이란다.
“이 촌구석을 어찌 알겠어요. 그런데 정보화 시대잖아요. 목장에 왔던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 블로그나 SNS에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유여행객들도 많이 찾아와요. 외국어 홈페이지가 필요하다 싶어 지금 준비 중이에요.”
조옥향 대표는 목장 안에 아주 특별한 레스토랑을 만들 계획이다. 은아 목장의 다양한 치즈로 파스타와 피자를 만들고, 다른 식재료는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한다. 여주 쌀과 제철 채소, 그리고 농민과함께 유청을 먹인 돼지를 생산하여 공급할 생각으로 함께할 농민을 찾고 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지역 먹을거리 운동, 또 다른 형태의 로컬푸드 사업이 될 것이다.
체험이 약속된 날은 새벽부터 점심때 내놓을 국과 반찬을 만드느라 조옥향 대표가 더 분주해진다. 옆에서 작은딸이 양을 좀 줄이라고, 다 못 먹는다고 성화지만, 좀처럼 그래지지 않는다. 목장을 찾은 이들이 최대한 푸짐하고 넉넉하게, 따뜻하게 마음과 배를 채우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늘 앞서버리는 것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이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었듯, 조옥향 대표는 무엇보다 따뜻한 리더십, 세심한 배려와 한결같은 진심으로 오늘도 세상과 치열하게 소통하며 산다. 아름다운 세상이 지속 가능하도록.
글·신수경 / 사진·김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