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도시, 그 중심엔 농민이 있었다

독일 생태마을 오버리드. 이곳에서는 축분과 옥수수 같은 에너지 작물을 섞어 신 재생 에너지를 만든다.
독일 생태마을 오버리드. 이곳에서는 축분과 옥수수 같은 에너지 작물을 섞어 신 재생 에너지를 만든다.

지난해 11월 방문한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프라이부르크의 보봉Vauban단지. 볕 잘 드는 언덕엔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프라이부르크는 ‘생태도시’로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와인으로 더 유명했다. 독일 남쪽에 위치해 기후도 따뜻한데다 볕도 좋다. 와인과 포도농사는 지금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주요 산업이다. 누군가 ‘독일의 에너지 변화사’에 대한 글을 내게 맡긴다면 이렇게 서두를 쓰고 싶다.
‘모든 것은 포도나무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서독 정부는 프라이부르크에서 30㎞ 떨어진 라인 강 변에 20번째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독일 남서부에 대규모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함이다. 수도권으로 치면 서울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경기 용인·수원·화성에 원전을 세우는 셈이다. 언뜻 생각하면 당장 시민들이 들고 일어설 것으로 생각되고 ‘서독 정부가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며 혀를 찰 분들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전 설치 지역이 사람이 많지 않은 농촌이라면 이런 비판 여론은 금세 사그라지고 ‘님비 Not In My Back Yard 현상’으로 매도되기 마련이다. 대도시 부산·울산 시내에서 대략 25~30㎞ 떨어진 기장군 장안읍에 원전 6기(고리·신고리)가 세워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의 원전 반대운동은 ‘포도나무 살리기’ 시위에서 시작됐다. 포도재배 농민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원전반대운동은 시민단체, 학생들에게 퍼져나갔다. 결국, 1975년 서독 정부는 원전 건립 계획을 취소했고 이후 독일은 환경분야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70년대 후반 녹색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원전반대운동의 작은 성공이 시민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한 것이다. 프라이부르크의 구성원들은 이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자기가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드는 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헬리오트롭은 자체의 전기사용량의 5배 이상을 생산하고 이를 전력회사에 되팔고 있다. 최첨단 에너지 절약형 주택이다.
헬리오트롭은 자체의 전기사용량의 5배 이상을 생산하고 이를 전력회사에 되팔고 있다. 최첨단 에너지 절약형 주택이다.
윤데마을의 열병합 발전소. 연 500만 kW의 전기를 생산하며, 남은 전기는 다른 지역에 판매한다. 마을 단위의 에너지 자립을 실천하고 있다.
윤데마을의 열병합 발전소. 연 500만 kW의 전기를 생산하며, 남은 전기는 다른 지역에 판매한다. 마을 단위의 에너지 자립을 실천하고 있다.

에너지 자립에 성공한 프라이부르크 보봉단지
내게 보봉단지 포도밭 언덕 옆에 있던 헬리오트롭Heliotrop은 포도재배 농민에게 바치는 승리의 상징으로 보였다. 1994년에 지어진 이 3층짜리 원통형 건물은 집 전체가 360도로 회전한다. 겨울에는 3중으로 된 유리창이 해를 향하고, 여름에는 단열재로 된 벽면이 해를 향한다.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은 ‘해바라기’ 마냥 하루 종일 해를 따라 돌며, 계절에 따라 각도도 조절된다. 헬리오트롭은 자체 사용하는 전기사용량의 5배 이상을 생산하고 이를 전력회사에 되팔고 있다. 에너지 절약형 주택으로서는 최첨단에 서 있는 건축물이다.
보봉단지에는 이런 에너지 절약형 주택이 대규모로 들어서 있다. 단열재와 태양열 등을 이용, 1㎡를 난방하는데 석유 4.5~5ℓ이하만 소비하는 저에너지 하우스·패시브하우스Passivhaus부터 필요량을 초과하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잉여에너지 하우스Plusenergiehaus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시는 기존 주택을 패시브하우스로 개조할 때 드는 비용을 낮은 이자로 빌려주기도 한다.
생태마을 보봉단지는 프라이부르크 시에 있는 11만 평 규모의 주거 단지로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92년까지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90년대 초반, 시는 이곳의 개발을 위해 공청회를 개최했고 생태마을을 만들기로 했다. 마을 입구에는 4층짜리 공동주차장이 있어 자동차의마을 진입을 최소화했다. 마을 사람들은 길가에 세워진 공용자동차(카 쉐어링)를 이용하거나 전차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공용자동차 이용자는 발급받은 ‘이용 카드’를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 앞유리에 대기만 하면 바로 차량 이용이 가능하다. 전차 레일은 잔디로 덮어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고 배차 시간도 짧았다. 공용자동차와 전차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설계해 주민들이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문비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한 독일 최대의 산림 ‘흑림 Schwarzwald(슈바르츠발트)’에는 풍력발전소도 몇 채 가동되고 있다. 발전기 하나가 연간 300만㎾의 전기를 생산하는데 시민들이 공동으로 출자, 협동조합 형태로 발전소를 설립한다. 전기 판매 수익금은 조합원들에게 배당된다. 과거부터 재생 에너지 기술에 투자를 늘리다 보니 재생 에너지 관련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흑림의 풍력 발전소밑에서는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보봉단지의 사람중심 표지판. 이곳에서는 자동차의 마을 진입을 최소화한다.
보봉단지의 사람중심 표지판. 이곳에서는 자동차의 마을 진입을 최소화한다.

독일엔 있지만 한국엔 없는 것
독일은 한국에 위에서 언급한 ‘친환경 프로젝트’들을 수출하고 있다. 한국의 공무원과 관련 산업 종사자들은 이를 배우기 위해 해마다 독일을 찾는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또 다른 도시 ‘칼스루에’에는 주말농장을 도입하려는 한국 공무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곳의 주말농장인 ‘클라인가르텐’은 도시 내에 자리 잡은 공용 녹지이다.
시는 공용 녹지를 정원으로 만들고, 도시 공기 정화에 이용하고 있다. 클라인가르텐은 도시민 휴
식공간이자 도시농업이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클라인가르텐의 녹지를 분양받은 시민들은 이곳에 채소, 과일 등을 재배하고 휴가 때에는 며칠간 쉬기도 한다. 클라인가르텐은 도시 중심에 있어 접근성도 높다. 클라인가르텐은 한국의 주말농장 형태로 도입됐고 앞서 언급한 보봉단지의 ‘카쉐어링 Car-sharing’ 제도를 도입한 지자체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 도입된 이들 공공 시스템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실패 원인은 시민의 역량·주체성이 얼마나 보장되는 사회인가
가 아닐까 싶다. 독일이 제도를 도입할 때 마을 주민들이 주체가 돼 만들어온 반면, 우리는 도입·설계·개발 주체가 중앙·지방 정부 혹은 기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말농장이 한국에서 공공성을 잃고 상업화가 되고 결국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한국 사회가 독일에서 본받아야 할 것은 ‘형식’보다 ‘내용’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을 설계하는데 동참하고 목소리를 내는 등의 활동이 시민의 권리로받아들여지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 특히 독일의 농민들은 원전 반대 운동을 펼치면서 값진 승리를 경험했고 이를 기회로 시민으로서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이런 경험은 독일 녹색당이라는 정당의 모습으로 정치세력화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테제These를 증명한 셈이다.

다시 농촌에서 희망을 보다
농업계에서도 독일식의 ‘에너지 자립’은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거쳐야 할 길이다. 작은 성공의
실마리를 프라이부르크 인근 오버리드 생태 마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세 곳의 축산 농가가 축분을 지하 저장고에 함께 모아서 건초와 섞어 바이오가스를 만든다. 세 농가가 생산한 바이오가스는 공공건물, 다른 농가 등에 전력과 온수를 공급하는 데 쓰인다. 독일 연수에 동행한 농민들은 오버리드 생태마을의 에너지 자립 설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방목 방식보다 축사에서 사육하는 우리 농촌에도 응용할 여지가 높아 보였다.
이 외에도 독일 중부 니더작센주 쾨팅겐 인근의 윤데마을은 좀 더 큰 규모의 발전 시설을 갖췄다. 우드 칩을 활용한 열병합 발전, 가축분뇨 등을 활용한 열병합 발전으로 연 500만㎾의 전기를 생산한다. 마을이 쓰고 남은 전기는 다른 지역에 판매한다.
오버리드 생태마을의 사례는 우리 농민들도 농가 단위로, 마을 단위로 에너지 자립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확산된다면 지속 가능한 농업은 물론, 국가 전체의 에너지 자립을 이끌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농가·마을 단위의 에너지 자립은 농민의 자율성, 농정을 주도해 나가는 힘을 만들어 가는데 직·간접적으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 농민과 시민들의 시민의식이 반 원전 운동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독일처럼 협동조합 형태로 재생 에너지 시설을 만들기에 농촌만큼 적절한 곳도 없다. 도시 사람들을 위한 대규모 원전 시설 등이 사람 한적한 농촌에 세워지는 일도 막을 수 있다.
독일 연수 동안 그들의 성공 사례가 부러웠다. 독일의 ‘원전 제로’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작은 마을 단위에서, 도시 단위에서 에너지 자립에 성공했다는 경험은 원전 제로를 목표로 하는 독일에 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사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그리고 그 성공을 이끈 주인공은 바로 농민이었다.

44※필자 이재덕: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대산농업전문언론장학생 출신으로 꽃, 나무, 숲을 좋아하는 시골스러운 도시 남자이며 한국농업기자포럼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