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일상이 바로 예술입니다”

송일근 달빛무월마을 위원장

대나무, 슬로시티, 소쇄원, 면앙정 등 전남 담양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문화경관과 연관이 깊다. 벼슬을 뒤로하고 담양으로 내려온 선비가 여럿 있을 정도로 풍류와 정취가 남다른 지역이다. 대덕면 금산리에는 담양의 명성에 어울리는 ‘달빛무월마을’이 있다. 아름다운 돌담길로 유명한 이마을은 올해 9월 전국 행복마을 콘테스트 ‘경관환경 부문’ 금상을 수상했다. ‘달을 어루만지는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마을 곳곳을 어루만지듯 아름답게 가꾼 달빛무월마을의 위원장이자 농부 도예가인 송일근 씨(59)를 만났다.

농촌은 농촌다워야
송일근 씨는 마을 사업으로 전통문화와 자연경관을 복원했다. 평범했던 시골 마을은 전국에서 가장 자연과 전통이 잘 어우러진 마을로 바뀌었다.
“시골은 시골다워야죠. 도시 사람들이 농촌에 쉬러 오는데 농약병과 비닐만 뒹군다면 누가 올까요.”
특별한 무언가가 없어도 쓰레기만 없어도 도시민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공동 분리수거장을 만들고, 쓰레기 투기가 자주 일어나는 곳에는 인공연못을 설치했다. 마을이점점 깨끗해지니 마을 사람들의 생각도, 습관도 바뀌었다.
2009년에는 전라남도 행복마을 사업을 통해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현재 마을에는 30여 동의 한옥이 있다. 많은 이들이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마을의 절반이 빈집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마을로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줄을 서도 자리가 없다.

마을을 한 바퀴 두르는 돌담길은 마을 주민이 품앗이로 힘을 합쳐 쌓아 올렸다.
폐가를 얻어 지은 허허공방. 쓰다 버린 농기계로 대문을 장식했다. 문패는 부인 정연 두 씨가 직접 썼다.

허허롭게, 무던하게, 욕심 없이 삽니다
송 위원장은 7대째 마을을 지키고 있는 토박이다. 87년부터 도예를 본업으로 삼아 도자기와 토우를 만들고 있다. 4천 평 규모로 유기농 벼농사도 짓는다. 작품 활동을 위해 농사에 시간과 힘이 적게 들어가는 ‘저절로 농법’이 가능한 건답을 택했다. 소출은 적지만 식구가 소박하게 먹고 살만은 하단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도시에서 살겠노라며 회사에 취직했지만, 농촌과는 다른 환경에 몸과 마음 의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 시기에 우연히 도예를 접하면서 심신을 천천히 회복시켰다.

“몸이 아파서 힘쓰는 일은 직업으로는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디, 이게 만들수록 재미가 붙어요. 나야 뭐 남들처럼 미술대학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허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봤죠.”
도자기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집 앞에 폐가를 얻어 본격적인 작업실을 지었다. 욕심 없이 허허 웃으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허허공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고작 30만 원으로 직접 유리창을 붙이고 흙벽을 세우고, 도자기를 구울 가마도 손수 만들었다. 추운 겨울이면 밥솥을 끌어 앉은 채로 자면서 도자기를 구웠다니 열정이 대단했다. 
부인 정연두 씨(56) 역시 송 위원장 못지않은 예술가다. 마을 집집마다 붙은 모든 문패를 직접 썼다. 부부가 사는 집 자체도 하나의 작품인데 온 가족이 10년에 걸쳐 지었다. 집안 곳곳에는 예술품이 가득하다. 헐어버린 한옥의 마루로 만들었다는 식탁, 아날로그 TV로 만든 조명등, 손바느질로 만든 조각보등 쓰고 버려질 물건도 부부의 손을 거치고 나면 예술 작품으로 바뀐다.
“처한 상황에서 욕심내지 않고 세간을 해결하려다보니 사물의 쓰임이 새롭게 보여요. 재활용이 아니라 재탄생한 셈이지.”
없으면 만들어 쓰면 된다며 자족하는 삶을 이야기했다. 농촌에서는 부자 되긴 어려워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며 송 위원장은 웃었다.

공방과 집에는 부부가 만든 예술품이 가득하다. 깨진 도자기, 쓰다 남은 천은 부부의 손을 거쳐 예술품이 다시 태어난다.
10년에 걸쳐 지은 집은 부부의 공동 작품이다.

마을이 담긴 도자기
송 위원장은 도예가들이 주로 쓰는 점토나 백토, 산청토가 아닌,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흙으로도자기를 만든다. 유약과 땔감 등 모두 마을 주변에서 난 재료를 쓴다. 이 고장의 토양은 철분이 많은 탓에 얇고 매끈한 그릇을 만들기엔 적합하지 않단다. 따라서 그의 가마에서 나온 도기는 대부분 거칠고 두껍다. 일반적으로 시도하지 않는 방식이기에 제대로 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굽는 온도를 낮추고, 점토 비율을 섞는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도기용 흙에 천연 유약 사서 만들면 쉽죠. 근데 이 지역 흙으로 만들어야 무월마을만의 색이 그릇에 나타나는 거지. 내가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 흙을가지고 농사를 해서 생활을 하고, 이게 내 생명줄인데 내가 쓰는 그릇들을 이 흙으로 만드는 게 당연한 거라.”
모든 사람이 모두 같은 재료를 만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느냐며 송 위원장은 웃었다. 그가 만든 도자기는 무월마을이 담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작품이다.

지역의 흙으로 만든 도기와 토우는 거칠고 질박한 느낌을 준다.

농사와 예술, 마을 만들기가 결국 같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대추 한 알이 저절로 붉어질 리없다. 도자기 하나가 나오기까지, 행복한 농촌마을사업이 이루어지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송일근 씨에게 농사와 예술 그리고 마을 만들기는 모두 같은 일이다.
“농사도 예술도 인내가 중요해요. 물을 많이 준다고 벼가 빨리 자라지 않고, 서둘러 굽는다고 도자기가 바로 나올 수 없듯이 충분히 기다려야 하죠. 마을 사업도 마찬가진 거라.”
그는 욕심 때문에 마을 특유의 정서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강조했다. 마을을 바꿀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주민들의 생각이 바뀌고, 의견이 공유될 때 까지 천천히 가야 한단다.
농촌의 일상은 그의 스승이다. 새싹이 나고, 벼가 스러지고, 열매가 맺히는 무한한 변화는 작품의 원동력이 된다. 겨울을 보낸 땅에서 새로 움트는 생명을 보며 중병을 회복한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생명의 숨결이 살아있는 농촌은 매 순간이 기적이다.
“농촌에 살면서 돈에 매여 있으면 불행한 거지. 좋은 것 중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잖아요. 눈 떠서 보는 아침 햇살, 일하러 가다가 마주하는 바람이 얼마나 좋아요.”
농촌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많은 것을 누리며 산다는 송일근 씨. 허허롭게 웃으며 느긋하게 기다리는그의 삶이 만들어낼 다음 작품이 벌써 궁금해진다.

글ㆍ사진 김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