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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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군이 벌판을 뒤흔들고 지나간다.
눈보라가 치더니 바람이 벽에 부딪혀 되돌아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달팽이마냥 몸 위로 이불을 덮고 움츠린다.
“김치전 했는데 막걸리나 한잔 하지?”
친구의 말에 이불을 집어 던지고 한걸음에 달려간다.
막걸리나…. 이 단어는 참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여유도, 응어리도, 우정도, 넋두리를 들어 줄 준비가 되어있음도…. 어떤 흉을 봐도 말이 나지 않고, 속내를 다 드러내도 맞장구 쳐주는 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은 맛도 감칠 난다.
친정아버지는 막걸리 애호가셨다. 곡주는 끼니도 된다며 자주 드시곤 했는데 난 그 모습이 싫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자신의 한을 술로 달래고 계시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나의 일방적인 그 해석 때문에 막걸리를 미워했는지, 정치를 미워했는지, 아버지를 미워했는지, 아무튼 모두를 미워했던 것 같다. 1960년대 아버지의 정치 생명은 시대를 잘 못 만나 장벽을 넘을 수도, 무너트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긴 세월 막걸리를 드시며 야인으로 은둔 생활을 고집하셨다.
시어머니는 친정아버지보다 막걸리 주량이 두 배가 넘었다. 저녁이면 필름이 끊겨 신을 신은 채 방에 들어와 흐느끼듯 울며 주무시기 일쑤였다. 조반도 드시기 전에 해장술로 시작해서 밭을 매면서도, 호박을 따면서도, 참참이 안주도 없이 막걸리를 드시고 취기가 오르면 흐느끼셨다. 그러다 취기가 가실만하면 또다시 술을 찾아다니셨다.
어머니는 욕을 일상용어처럼 하셨다. 술 힘을 빌려 며느리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욕설과 함께 모두 쏟아내고는 하셨다. 지켜보는 나 또한 사람인지라 마음을 다치기 일쑤였다. 우리는 전생에 어떤 빚이있었기에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고부의 인연으로 만난 걸까.
그렇게 해와 달이 바뀌어도 막걸리 양은 줄지 않고 어머니의 주사는 늘어만 갔다. 이십 년을 넘게 막걸리 수발을 들던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뜬금없이 말씀하셨다.
“내 속을 뒤집으면 시꺼멓게 탄 숯검정일 게다. 네가 날 봐주지 않으면 누가 봐 주겄냐.”
술시중 든 긴 세월의 보상은 그 한마디로 만족해야 했다.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 셋을 먼저 하늘로 보내신 분이다.
쓸쓸한 어머니의 표정 위로 아픔의 그림자가 누르는 그 묵직한 통증이 자꾸만 술을 찾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을 빌려 쏟아내던 흐느낌과 감정이, 실은 당신 아픔을 삭이는 처절한 절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나 당신의 아픔을 꽁꽁 감싸고 드러내지 않으셨다. 자존심 강한 성격 탓이었는지 당신 혼자 긴 세월 속앓이를 하셨다. 어머니는 그 한을 내색하지 않는 대신 막걸리로 사신 것이다. 터질 것 같은 당신의 가슴을 막걸리로 어느 정도는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남편과 자식을 따라 하늘로 가신 어머니도 좀 편안해 지셨을까. 지아비와 자식을 앞세운 시어머니의 옹이는 너무도 깊었고, 시대를 잘 못 만난 아버지의 옹이는 너무나 컸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의 옹이를 한두 개쯤 껴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이 술을 주신 걸까?
그렇게 미워했던 막걸리를 오십 줄에 들면서 조금씩 배운다. 나도 이제는 막걸리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막걸리 한잔은 닫혔던 마음을 풀어 주고, 두 잔은 생각을 바꾸게 하고, 석 잔은 가슴을 뜨겁게 한
다. 미움도 덮어지고 화도 가라앉히고 고마움은 배가 되고 가끔은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김치전을 핑계 삼아 막걸리를 마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자잘한 옹이도 풀어주며….

※필자 김단이: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원. 평택에서 채소농사를 지으며 집필 활동을 한다. 계몽사와 색동회 주최 전국 어머니 자녀수기 공모 은상 수상(1995), 월간 아동문예 아동문예문학상을 수상(1999)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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