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희 행복중심 여성민우회생협 생산자회 회장
산과 들판이 흰 눈으로 포근히 덮인 12월. 경상북도 상주에는 곶감 말리기가 한창이었다. 모든 농사가 다 그렇지만, 곶감 말리기는 특히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곶감 건조기간 동안 주변 온도나 습도가 높으면 곰팡이가 피고, 추워지면 감이 얼어버려 곶감이 되지 못한다. 적당한 바람과 습도,햇빛과 같은 자연의 협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하늘과 동업하는 거죠.” 조원희 씨(45, 행복중심 여성민우회생협생산자회 회장)다.
생산과 농민운동의 경계, 그루터기 공동체
조원희 씨를 따라 곶감 건조장을 찾았다.
둥글게 깎여 실타래에 줄줄이 엮인 감들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때마침 곶감 건조장 옆 작은 사무실에는 생산자들이 모여 곶감 출하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그루터기 공동체’의 회원들로 30~40대의 젊은 농부들이 모여 공동으로 곶감을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다고 했다.
“생산과 생활로 돌아가면, 농민 운동하는 사람이랑 생산자랑 차이가 없어져요. 그래서 젊은 농민운동가들이 농업문제를 해결해보자고 이 모임을 만든 거죠.”
‘그루터기 공동체’에서는 생산 문제뿐만 아니라, 지역 농업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도, 실천도 함께 하고 있다.
땅을 굶겨 길들이다
조원희 씨는 이곳 상주가 고향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누나, 형들을 따라 ‘서울 유학’을 했다.
“학교 가는 길에 논두렁에서 자기도 하고, 부모님께서 ‘여기 놔두면 나중에 뭐가 될꼬’ 한거지요.”
그런데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대학에서 농연사(농민학생연대사업부) 김제, 정읍지역 책임을 지고 있었어요. 서울생활은 별로 재미없었고,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아들이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도시생활을 하기 원했던 부모님의 반대에도 농사를 물려받아 짓기 시작했다. 풍양 조씨 일가가 모여 이룬 집성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젊은 청년의 패기 넘치는 농사 도전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농약 쳐라’ 하면 안치고, ‘비료 줘라’ 하면 안주니 갈등도 많았다.
“한번은 무농약으로 사과농사를 짓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었죠. 고온이 계속되고, 여름에는 집중호우가 왔어요. 결국 사과나무들이 병이 들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 해 나무를 다 베어냈었죠.”
우리나라 풍토에서 각종 병해충과 싸워가며 사과를 친환경으로 재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사과농사를 그는 오히려 ‘스릴있다’고 이야기 한다.
“원칙적인 유기농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과 행동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흙을 살리기 위해 가능하면 농약이나 비료는 줄이려고 노력했죠.”
사과밭에 농약을 끊고 퇴비를 주었다. 처음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굶기기에 들어갔다. 퇴비도 안 준 것이다. 2년을 굶기니 땅이 좋아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땅이 스스로 힘을 키우게 한 후 퇴비를 주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흙에 지렁이도 많아지고, 과수원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농민의 권리를 찾아 움직이다
조원희 씨는 현재 사과 5,000평, 배 5,000평, 감 300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 1996년부터 경기도
의 한 생활협동조합과 직거래를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생산한 농산물을 모두 생협이나 직거래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는 생산한 작물을 모두 공판장에 내다 팔았다. 공판장에 팔 때에는 값을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가격결정을 생산주체인 농민이 아니라 시장에서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가격결정권은 생산주체가 보장받아야 할 중요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던 거죠.”
농민의 권리를 지킬 방법으로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생산자 참여를 택했다. 생협과 거래를 시작하면서 그는 농민으로서 가격결정권에 참여해 생산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비자와 직거래가 가능해지면서 내가 생산한 것을 누가 먹는지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이 생산자로서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높여주었다고 했다.
이 자존심과 책임감은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던 젊은 청년이 지금까지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교류와 연대
지속가능한 농업,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농업은 이제 더 이상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소비자들도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합
니다.”
농업과 농촌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 변화를 위해 일정한 도농교류 거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승곡체험마을’을 만들었다. 이곳은 마을의 10개 농가가 함께 운영하고 관리한다. 조원희 씨는 이 체험마을을 통해 도시 소비자와 함께 교류하며 지속가능한 지역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지난 2012년 3월부터는 상주 지역에서 생산한 제철 농산물을 도시 소비자에게 배달하는 ‘꾸러미 사업’도 시작하였다. 조원희 씨의 아내 박은주 씨(43)가 사업단장을 맡고 있다. 조 씨 부부는 상품구성의 다양화와 연중공급체계를 갖추어 꾸러미 사업을 활성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또한 2013년 새해에는 학교현장에서의 체험교육과 텃밭 가꾸기, 교육과정에의 안전한 먹을거리 교육 마련 등의 ‘상주 식생활교육네트워크 만들기’를 실행할 계획이다.
흙을 변화시키고 땅을 길들이던 젊은 농사꾼은 이제 우리 농업과 공동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더 단단히, 그리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처럼, 새벽농장 사과밭의 나무들도 추운 겨우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흙의 자양분을 흡수할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면 꽃을 피울 것이다. 하늘과 함께 농사짓는 농부 조원희 씨의 부지런한 손길로 그 꽃은 건강한 열매로 자라나 우리 곁으로 올 것이다. 따뜻하고 반가운 소식이 기다려진다.
글·사진 / 김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