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1월 20일~29일 대산해외농업연수에 참여해 쿠바의 도시농업, 유기농업을 취재한 후기입니다. ‘장님 코끼리 더듬기 식’이라는 것을 미리 고백합니다.
쿠바의 농업이야기를 하기 전 먼저 그들의 고단한 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군요.
미국이 봉쇄한 작은 세계
“쿠바에 매우 큰 적이 있다.”
쿠바국제친선협회(ICAP)의 여성지도자가 지난해 11월 21일(현지 시각) 자신을 방문한 한국의 농업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유엔총회에서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봉쇄 해제를 찬성한 남한(South Korea)이 고맙다면서 “쿠바와 친구가 되는 것은 더 큰 적을 만드는 일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이 지도자는 지난해 11월 30일 체 게바라의 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주 아래 카리브해, 북위 20~23.5° 사이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이 섬나라는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인들 눈에 드러나기 전엔 세계사에 등장한 적 없이 그들만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 이후 이곳은 스페인 왕족과 귀족을 위한 약탈지로 전락했고, 원주민들은 거의 전멸했습니다.
스페인 식민의 역사는 400여 년간 이어졌습니다. 기나긴 압제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19세기말 집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8~19세기는 인류사에서 실로 위대한 시기였습니다. 도처에서 봉건과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처절한 투쟁이 일어나니까요.쿠바에서는 호세 마르티라는 출중한 지도자가 해방전쟁을 이끌었지만 1895년 2차 독립전쟁에서 스페인에 패했습니다. 그와 40만 명의 독립군이 희생됐죠. 스페인을 밀어낸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에 선전포고한 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쿠바에 자신들을 대리하는 정권을 세웁니다.
스페인이 물러간 자리에 미국이 들어온거죠.
카스트로 형제와 게바라 등이 주도한 1959년 쿠바 혁명은 처음부터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혁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과 치열한 냉전 중이던 미국은 민족주의 국가건설조차 사회주의 영향력의 확대를 막는다는 전략 아래 워싱턴을 방문한 카스트로를 냉대합니다. 쿠바혁명지도부는 살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았습니다. 게바라는 카스트로보다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다고 알려졌지만 쿠바혁명을 지도한 이는 분명 카스트로였고, 카스트로는 공산당을 실용적으로 이용했을 뿐이었습니다. (체 게바라와 쿠바혁명_책갈피_에서 인용)
하지만 소련과의 무역도 사탕수수를 수출해서 석유를 포함한 생필품을 구입하던 스페인, 미국체제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 돌파 – 쿠바의 도시·유기농업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는 사탕수수를 주로 심는 단작 농업국이었습니다. 미국, 소련 시대를 거치면서도 식량과 에너지를 외부에 의존했습니다. ‘미국봉쇄, 소련붕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게 됐을때 그들은 ‘도시를 경작’하는 방식으로 살 길을 찾았습니다.
쿠바식 도시 유기농업을 상징하는 알라마르 협동농장(UBPC)을 방문했을 때, 미겔 쌀씨네 농장대표는 “쿠바는 1960년 당시 70% 이상 수입에 의존했다. 모든 인구는 설탕을 팔아 다른 먹을 것을 사야했고 소련시대에도 이는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소련은 쿠바를 최대 설탕 생산국으로 만드는 정책을 폈다. 소련이 무너졌을 때 인구의 80%가 도시에서 사는 상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소련시대 1,200만 톤의 석유가 소련에서 들어왔지만 소련이 망한 후 외부에서 들어온 석유는 3톤뿐이었다고 합니다. 비료, 농약, 동물사료, 농기구 등의 수입은 ‘제로’였고요. 미겔 씨는 “유기농을 하느냐 아니면 죽느냐,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유기농을 빨리 배울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미겔은 농림부에서 20년 근무한 관료 출신입니다.
쿠바농림기술자협회(ACTAF)에서 국제교류를 담당하는 페르난도 씨는 “소련 붕괴 후 ‘비상시기’에 돌입했다. 미국은 우리 목을 더욱 졸랐고 석유 사용 가능성은 이전보다 30%로 줄었다. 비료와 농약은 각각 25%, 40%로 줄었다. 생산량은 30%로 줄었고 경제는 15%로 추락했다”며, “단작 위주였으니까 하나가 무너지니 모두 붕괴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유기농을 가르치는 학교는 종교와 같았다고 합니다. 단작에서 다품종으로, 석유의존 화학농업에서 석유 없는(의존성을 낮춘) 저투입 유기농업을 교육했고, ‘화학비료 농업만 가능하다’는 통설을 뒤엎는 새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도시 유기농업은 쿠바의 농업과 쿠바인의 생활을 크게 바꿨습니다. 식물방역연구소(INISAV)의 베르따히나 무이뉴 가르시아 부대표는 1990년 이후 화학농약 사용량이 확연히 줄어든 그래프를 보여줬습니다. 다만, 1992년에 화학농약 사용량이 일시적으로 늘어났는데 경제위기로 유기농업을 지원하는 쿠바 내 연구소들도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물학적 제재를 사용한 경지 면적은 1988년 30만ha에서 2011년 130만ha로 증가했고, 2012년에는 200만ha(추정)로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연구 성과도, 실용화하는 능력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죠.
쿠바의 총 경작지는 산림, 목초지, 과수를 포함 600만ha인데, 먹거리 생산용 경지는 312만5,000ha, 그 중 80%인 250만ha는 생물학적 제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목표를 식물방역연구소는 갖고 있습니다.
식물방역연구소는 병해충 방지프로그램으로 2011년에 1,200톤의 생물학적 제재를 만들었고, 천적곤충 900만 마리를 생산했습니다. 천적 곤충은 2012년에는 1,200만 마리로 늘었습니다.
한국의 농업인들이 쿠바의 유기농업을 처음 접했던 2003년과 비교해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유기농업을 연구, 전파하는 열대농업연구소(INIFAT)의 다니엘 발라까세다 씨는 “2009년부터 도시농업이 근교농업으로 확대되었고, 차광막 방식을 사용하는 등 도시농업이 발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오가노포니코, 쿠바인 생활 속으로
쿠바의 독특한 ‘오가노포니코’ 방식이나 일반가정의 앞 뒷마당과 옥상농업도 더 발전하고 있고, 토끼, 염소 등 가축농업도 발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가노포니코는 밭을 화분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콘크리트 벽돌과 돌, 합판, 스티로폼 등으로 둘레를 친 다음 그 안에 지렁이분변토와 유기물 퇴비를 넣고 집약적으로 채소를 키웁니다. 쿠바의 도시 유기농업은 경축순환방식(가축의 배설물을 퇴비로 사용하고, 가축의 먹이를 수입하지 않고 재배해 공급)이 기본입니다.
무엇보다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정책으로 100만ha를 무상 임대해 14만 개의 피카(농장)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 중엔 협동농장도 있고 개인농장도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곡물 자급률에 대한 거듭된 질문에도 정확한 통계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반적인 자급률은 높아지고 있지만 쌀과 곡류, 분유, 육류 등은 여전히 수입의존도가 높다고 말했습니다.
도시농업은 쿠바인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2012년 11월 26일, 아바나 시 5번가에 있는 오가노포니코 풍경을 소개합니다.
오전 9시 개장. 개장 시간 전부터 주민들이 몰려와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프란시스코 알론소 씨는 “버스로 15~20분 정도 떨어진 베다도에 사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에 온다”며 “같은 값이면 품질 좋고 신선한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농장 바로 앞 아파트 주부들은 양손에 배추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농산물 생산-유통의 거리를 최대한 단축한 도시농업을 통해 이들은 석유가 부족한 사회에 적응한 것이죠.
물론 여전히 부족합니다. 서정혁 코트라 아바나무역관장은 “채소 등을 구하기 어려워 일반 마트에서 산다”며 “좋은 오가노포니코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989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입니다. 석유와 화학적 농업자재가 아무것도 없는 조건에서, 사탕수수 농사만 짓던 쿠바에서, 인구의 80%가 사는 도시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해 일군 성과니까요. 2004년 쿠바의 에너지효율성연구소가 95개 농업 현장을 조사한 결과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관행농법에 비해 유기농업의 에너지 효율이 5~6배 높았습니다.
쿠바의 유기농업은 도시농업(중심지에서 5km 이내)에서 도시근교농업(중심지에서 10km 이내)으로, 숲(과수생산)을 포함한 전국으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품목도 채소(도시농업)에서 과일, 쌀(주식), 사탕수수(대규모 수출농업)로 확산 중이죠. 도시농업 종사자는 2000년 20만 명에서 2005년 35만 명, 2011년 45만 명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쿠바는 도시·유기농업을 통해 미국 없이, 석유를 적게 사용하면서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쿠바의 유기농업은 국제기준에 따른 인증을 받은게 아닙니다. 상품으로 활발히 거래하기보다는 지역공동체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저농약 수준이랍니다.
하지만 쿠바는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도시·유기농업에 집중 투입하고 있어 세계가 주목할 성과물들을 내고 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쿠바의 지식과 국가 체계를 석유농법을 대체한 유기농업에 집중 투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전생명공학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쿠바에서 외화획득 1위 산업은 관광, 2위가 생명공학이지만 5년 안에 생명공학이 1위가 될 것”이라며 “우리는 농업 관련 식량생산 및 자급률을 높이는 연구도 진행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개발한 당뇨병 치료약은 ‘풍’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약으로 한국(보령제약)을 포함 100여 개국에서 수입을 타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생명공학 관련 연구 수준이 세계적이라는 것이죠.
토양연구소에서도 정부(농림부)와 생물학적 기술 프로그램을 연구·보급하는데 콩종류에 사용하는 박테리아,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하는 박테리아, 질소 사용량 30%를 낮추는 박테리아, 미네랄 섭취 30% 줄이는 박테리아 등을 개발해 쿠바 외에 다른 나라에도 수출하고 있습니다.
국내 대표적 유기농자재 생산기업인 흙살림이 브로콜리, 케일, 배추, 상추, 대파 등을 대상으로 쿠바식 유기농업과 국내 유기농업을 비교측정(2004~2005년)했는데, 브로콜리와 파는 국내 유기농업 단작형태보다 쿠바식 혼작재배에서 더 많은 수량이 나왔습니다.
경제봉쇄를 푸는 힘, 쿠바의 도시·유기농업
좀 더 고찰해봐야 하는데, 쿠바의 도시·유기농업은 미국의 경제봉쇄를 푸는 힘으로도 작동하는듯합니다. 50년 이상 계속한 경제봉쇄, 특히 소련붕괴 이후에도 쿠바의 경제가 망하지 않고 활기를 찾고 있기 때문이죠.
한국도 미국이 봉쇄하고 있는 쿠바와 매우 가까워지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코트라(KOTRA.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도 아바나에 진출해서 양국의 경제적 교류를 더욱 촉진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만난 서정혁 코트라 아바나무역관장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기 전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도 코트라 역할”이라고 말했습니다.
코트라의 발표로는 현대자동차는 쿠바에 한 해 2,000대, 기아차는 한 해 1,000대의 신차를 수출합니다. 중고차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 LG전자는 쿠바 정부와 직접 거래한다고 합니다. 쿠바 관광부에 따르면 한국인 관광객은 2010년 3,800명, 2011년 4,300명, 2012년 4,500명(11월 20일기준)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2년 아바나대학에 한국어 과정을 개설했는데 80명 모집에 180명이 지원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한국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봉쇄 해제를 ‘찬성’했습니다. 미국의 묵인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일반적 짐작입니다. 미국으로서도 쿠바를 고립시키지도 항복시키지도 못한 50년 경제봉쇄를 고집하기보다 시장을 통해 미국식 생활방식, 철학, 자본을 쿠바에 상륙시키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지요. 지구촌에서 ‘아메리칸 스타일’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통용되니까요.
50년 경제봉쇄와 소련붕괴라는 이중 위기 속에서도 도시·유기농업을 통해 생존에 성공한 쿠바는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쿠바 안에서는 다시 ‘석유가 풍부해지면 어떻게 될까’에 대해 엇갈린 관측이 있습니다. 알라마르 협동농장의 미겔 씨는 “건강을 생각할 때 옛날식 농업으로 되돌아갈수 없다”고 말했지만 식물방역연구소 소속 기자는 “관행 농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쿠바의 젊은이들도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힘든 일을 싫어합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이들은 농업보다 경제학, 법학, 의학 등을 전공하려 합니다. 호텔 앞에서는 밤마다 쿠바의 남녀 젊은이들이 모여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쿠바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요?
※필자 정연근: 내일신문 산업팀 기자. 2007년 7월부터 농어업과 농어촌 등을 취재하고 있다. 전문지를 제외하면 일간지와 방송을 통틀어 가장 오래됐다. 농업기자포럼 발기인으로 동료들과 매달 한 차례씩 토론회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