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을 이긴 나무들,
희망을 이야기하다

-거제 외도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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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남쪽, 구조라항에서 뱃길로 4km, 10여 분을 달리면 외도(外島)에 닿는다. 외도의 원래 이름은 외조라도이고, 외도 옆에 있는 내도는 내조라도인데 모두 구조라(舊助)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람들이 줄여 부르기 시작하면서 외도, 내도가 되었다.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외도를 눈과 마음에 담기 위해선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조금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커다란 기둥에 새겨진 ‘外島’라는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이후 눈길을 잡고 걸음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5만 평에 달하는 이 섬에선 각양각색의 다양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정돈된 정원과 특이한 모양으로 가꾸어진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 12명의 전문가가 정성스럽게 가꾼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외도는 자연의 오롯한 아름다움과 사람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곳이다.

편백이 감싸안은 천국의 계단
편백이 감싸안은 천국의 계단
외도에서는 조화롭게 펼쳐진 1천여 종의 다양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외도에서는 조화롭게 펼쳐진 1천여 종의 다양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2012년 가을, 태풍을 이긴 나무들
그런데 올가을, 자세히 들여다본 외도의 풍경이 심상치 않았다. 잘 정돈된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인데, 중간 중간 빛을 잃은 대나무와 잎이 말라 만지면 바삭거릴 것 같은 종려나무, 향나무들이 눈에 띈다. 바다와 마주한 곳에 있던 나무들은 쓰러지거나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았다.
“태풍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비가 오지 않고 마른 상태에서 나무들이 염분을 뒤집어쓰면 이렇게 말라버립니다.”
외도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지역. 일 년에 두 세 차례 태풍을 맞고 있다는 외도 지킴이 김종하 이사의 설명이다. 지난가을 두 차례의 큰 태풍으로 고운 빛깔의 가을꽃들과 무성한 잎을 자랑해야 하는 나무들이 시들어 버렸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노랗게 뜨고 말라버린 잎과 줄기 사이에서 새 잎이 돋고 있었다. 그 나무가 온전히 살 수 있을 지는 내년이 되어봐야 안다고 했지만 모진 태풍에도 새로운 싹을 틔우는 나무는, 이미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짝이는 동백나무의 비밀
정상에 오르니 외도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감추고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종려나무가 만들어내는 나무 그늘, 동글동글 푸근한 마음을 허락하는 향나무숲, 형형색색 아름다운 가을 꽃들, 편백이 감싸 안은 ‘천국의 계단’……. 그리고 수려한 동백나무들.
“동백나무 잎들이 유난히 빛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김 이사가 불쑥 물었다.
“염분 피해를 줄이기 위한 나무 스스로의 노력이에요. 염분에 말라죽지 않기 위해서 큐티클 층을 만들어 자생력을 키운답니다. 어린나무일수록 잎이 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큐티클 층을 형성하고 그래서 더 빛나는 거죠.”
유난히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던 동백나무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햇살이 넉넉하게 비추면 눈이 부실 정도다. 그런데 이런 나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1, 2년 안에 큐티클층의 상당부분이 사라진단다.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무가.”

예전 다랭이논 자리에 심어 놓은 향나무숲은 아늑한 휴식공간이다.
예전 다랭이논 자리에 심어 놓은 향나무숲은 아늑한 휴식공간이다.
두 차례의 태풍으로 외도의 나무들은 염분 피해를 입었지만 새싹을 틔우고 있다.
두 차례의 태풍으로 외도의 나무들은 염분 피해를 입었지만 새싹을 틔우고 있다.
물 저장탱크 위에 만든 잔디밭과 조각공원
물 저장탱크 위에 만든 잔디밭과 조각공원

식물원을 열다
1969년, 40여 년 전 낚시를 즐겼던 교사 출신의 사업가가 풍랑을 피해 우연히 이 섬에 들어왔다. 섬에는 여섯 농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수백 년이 된 귀한 동백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쓰고 있었단다.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먹고 살게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인사처럼 던진 말이 씨앗이 되어 사업가는 그 섬을 사게 되었다. 그가 바로 고(故) 이창호 씨다.
이것이 오늘 외도의 시작점이다. 이창호·최호숙 씨 부부는 서울과 거제를 오가며 섬을 개발했다. 처음엔 밀감나무를 심고 돼지도 키웠다. 축분을 이용하여 밀감도 키우고 양돈업으로 수익도 올리겠다는 생각이었단다. 그런데 밀감나무는 심은 지 5년 만에 염분피해를 이기지 못하고 다 말라죽었고 돼지를 키우는 일도 실패했다.

희망이 없던 섬, 기적을 일구다
희귀한 꽃과 나무, 유럽의 정원에서 보았던 많은 식물들로 본격적인 식물원이 만들어진 건 1976년부터였다. 이창호 씨 부부가 식물들을 직접 운반해 하나하나 심으면서 외도를 거대한 식물원, 문화의 공간으로 만들어갔다. 섬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젠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식물들로 섬이 채워졌다.

외도의 작은 교회에선 해마다 일출행사를 한다.
외도의 작은 교회에선 해마다 일출행사를 한다.
사택의 안. 마루로 둘러싸인 마당은 지중해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사택의 안. 마루로 둘러싸인 마당은 지중해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외도의 유일한 학교 운동장 자리에 세워진 마리아가든은 다양한 꽃과 나무 그리고 조형물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유럽의 정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최호숙사장 부부가 프랑스, 영국 등 외국의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꾸민 곳이다. 정원은 숲과 잔디와 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전의 감자밭과 고구마밭 자리, 그리고 분교 운동장 등만 정원으로 꾸몄고 다른 공간은 섬 자체가 품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도록 했다.
부부가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과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는, 채석강 자리에 부차드 부부가 꽃과 나무를 심어 세계적인 정원으로 만들었던 캐나다 빅토리아 섬의 부차드가든 모습이 겹쳐지기도한다.
1995년 “외도해상농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을 당시만 해도 이런 섬에 누가 오겠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2012년 현재 연평균 100만 명이 찾아오는 외도는 거제 지역의 경제 흐름과 관광지도를 바꿔놓았다.

아열대 식물을 비롯해 1천여 종이 사계절 다르게 피어 사람들의 눈을 호강케 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외도. 아무도 찾지 않던 작은 섬 외도는 이제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희망을 보여준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처럼.
(외도 보타니아 www.oedobotania.com)

글·사진/신수경(sk@d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