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위기 시대를 헤쳐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이미 식량위기에 들어섰다
올해 들어 부쩍 식량위기의 재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나 미국, 러시아, 중국, 우크라이나 등 주요 곡창지대의 기상악화로 흉작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국제 곡물가격이 크게 오르기 시작하자 지난 2007/2008년에 이어 식량위기의 재발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부각되고 있다.
일부 식품 대기업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발 빠르게 각종 가공식품의 가격을 인상했거나 혹은 인상을 준비하고 있다. 먹거리의 가격상승은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에 부담을 주고, 특히 빈곤층의 생계유지에 커다란 위협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 모두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지난 2007/2008년에 식량위기가 지구촌을 강타하였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다시 식량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사실 식량위기 상황을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이후로 전 세계는 이미 총체적인 식량위기 상황으로 접어들었고, 식량위기는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 식량위기의 시대
2000/2001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 식량의 총생산량이 총소비량보다 낮은,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세계 총생산이 총소비 보다는 많지만 빈곤국 및 빈곤층의 식량부족과 기아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되었던, 소위 ‘상대적 식량위기’의 시대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로는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는 절대적 식량위기까지 겹치게 되었다. 여기에 초국적 농식품복합체가 주도하는 글로벌푸드시스템이 먹거리를 장악하면서 먹거리 안전도 위협받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식량위기의 시대가 되었다.
소비량이 증가한 주요 이유로는 육류 소비의 증가, 중국과 인도 등 신흥 개발도상국의 소비 증가, 바이오연료 소비 증가 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문제는 생산에 있다. 농업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단위 생산성의 증가에도 생산이 소비를 감당
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후변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사막화가 확산되고 물이 부족하여 경지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잦은 기상이변으로 태풍, 홍수, 가뭄 등이 빈발하는 등 자연재해가 식량생산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농산물의 자유무역과 농업구조조정은 경지이용률의 감소, 중소 가족농의 몰락을 초래하여 식량생산을 제약하는 구조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지금의 식량부족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경제성장에 따른 식량 소비구조의 변화 및 기후변화와 세계화로 인한 생산구조의 변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적인 위기상황이다. 세계적으로 식량 수급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따른 식량위기의 구조화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식량위기와 가격폭등
만성적인 식량부족이 구조적으로 고착되면서 2000년대에는 국제 곡물가격도 폭등하기 시작했다. 2010년 주요 곡물가격은 2000년에 비해 약 2∼2.5배가량 올랐는데, 이는 1930년대 대공황 및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이미 식량위기에 의한 전반적인 먹거리의 가격폭등, 즉 애그플레이션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애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2007/2008년처럼 기상악화로 인한 대규모 흉작이 벌어지면 공급부족은 더욱 심각하게 된다. 이 시기에 러시아, 중국, 우크라이나 등 주요 곡물수출국들이 수출통제조치를 취하고, 곡물메이저와 국제투기자본에 의해 곡물투기가 성행하게 된다. 그러면 국제 곡물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면서 가격폭등이 아니라 가격의 광란이 벌어지게 된다.
지난 2007~2008년의 식량위기란 이와 같은 가격의 광란을 가리키는 것이며,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우려되는 식량위기 역시 이러한 가격의 광란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안전지대인가
문제는 이러한 식량위기가 짧게는 한 세대, 길게는 한 세기 동안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UN/FAO), 옥스팜(Oxfarm) 등을 비롯하여 대부분 국제기구와 전문기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식량위기의 장기화 및 곡물가격의 폭등을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과연 우리나라는 식량위기로부터 안전지대인가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011년 기준 22.6%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사실상 꼴찌다. 자급률이 낮기 때문에 우리 국민 먹거리의 3/4 이상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해외에서 수입되는 먹거리 대부분은 글로벌푸드시스템으로부터 조달되고 있다. 글로벌푸드시스템은 먹거리의 안전이나 사람보다는 자본의 이윤을 우선으로 한다. 이 때문에 국민이 먹거리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한국도 이미 먹거리 위험사회로 진입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식량위기와 가격폭등은 장바구니 물가와 생계비 부담을 가중시킨다. 이 때문에 빈곤층이나 저소득계층은 상대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먹거리에 더 많이 노출되는 먹거리의 양극화가 발생하고, 이는 질병과 건강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사회적 의료비용의 증가를 가져 온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한국도 이미 식량위기가 일상화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이 식량위기와 가격 광란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은 주식인 쌀은 그나마 자급기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쌀마저도 전면 수입 개방해야 한다는 정부와 기득권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쌀이라도 지키고자 하는 농민들의 저항이 지금 정도의 안정 상황이라도 유지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2011년 쌀 자급률마저도 86%로 떨어져 3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게다가 2014년쌀 관세화 유예조치가 끝나는 시점에서 정부는 쌀마저도 완전 개방하겠다고 한다. 최근의 식량위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작년과 올해 초 정부 일각에서는 조기에 쌀시장을 관세화로 완전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나왔다.
식량주권: 새로운 패러다임
이미 우리 곁에 일상으로 자리 잡은 식량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먹거리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국가의 식량주권,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정부가 책임을 지고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자 농민이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가능하도록 소득과 가격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미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농업과 먹거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다. 유엔 국제식량농업기구(UN/FAO), 유엔 인권이사회(UN/HRC) 등이 강력하게 권고하는 바와 같이 식량주권(food sovereignty)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식량주권의 제도화는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함으로써 먹거리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먹거리에 따른 건강과 안전의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의 질을 고르게 향상시킬 수 있다. 먹거리 기본권은 개인과 가계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로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위한 주요 과제의 하나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해외농업개발이나 국제곡물조달시스템을 통해 해외에서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겠다는 대책만 내놓고 있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해외농업개발이나 곡제곡물조달시스템은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경제성, 안정성, 지속성 등의 측면에서 실효성이 없는 대책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기본적인 식량과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국내에서의 자급률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적어도 중장기적으로 50% 식량자급률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순위로 검토해야 할 것이 남북이 공동으로 한반도 전체의 식량안보를 위해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며, 유럽연합 및 남미, 아세안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동북아지역 국가들과 식량안보 협력체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를 안정시키고, 농민들의 제값 받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초농산물의 가격 및 소득안정을 국가가 제도와 정책을 통해 책임지는‘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먹거리 양극화로 차별받고 있는 소외계층을 위한 먹거리 복지 프로그램도 최소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 정도로 확충할 필요가 있다.
향후 농정은 이를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서도 ①중소 가족농 중심의 협동체 육성 ②농지자원의 보전 ③지속가능한 생태농업 발전 ④먹거리 안전관리 체계 강화 ⑤한반도 공동 식량자급 확대 등과 같은 과제를 특히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국민도 공동 생산자이다
식량위기는 농민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의 문제이다. 이제는 국민도 단순히 먹거리의 소비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공동의 생산자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식량주권 혹은 먹거리 기본권과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은 사실 국민 개개인의 생존에 관련된 문제이다. 안전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잦은 가격파동으로 인한 서민가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주요 농산물의 가격안정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필요한 먹거리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먹거리 복지 프로그램을 확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식량주권, 먹거리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정책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국민도 공동 생산자라는 인식을 갖고 지역먹거리(로컬푸드), 도시농업, 도농공동체 등과 같은 새로운 대안적인 활동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필자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겸임교수,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을 맡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