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꽃은 핀다

울산과 마천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한 지 5년째다. 마천이 가까워지면서 자동차 속도계의 숫자가 높아진다. 가슴이 뛴다. 기다리는 이 없어도 고향이 가까워져 오면 절로 마음이 바빠지는 까닭이다. 마천 토종벌의 무리가 만들어내는 웅-웅- 귀를 울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듯하다.
들을 가로질러 도로는 계속 이어진다. 여리게 흔들리는 초록의 모가 눈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마침 수확 철을 맞아 갓 캐어 논바닥에 늘어놓은 양파 망들이 대륙에 펼쳐진 붉은 수수밭을 연상케 한다.
드디어 마천 초입, 조용하다.
5월과 6월은 분봉의 계절이다. 새로운 집으로 분가하는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축제의 폭죽을 터뜨리듯 마천을 울려야 하거늘, 하늘을 뒤덮던 여왕벌과 일벌의 무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미 삼 년 전에 ‘낭충봉아부패병’으로 토종벌이 집단폐사 한 것을 잊은 건 아니다. 마천 가까이 왔을 때 귀를 울리던 그 소리는 환청이었을까. 아니면 해바라기 마음이었을까.
“제수씨 왔어요?”
“예 별 일 없었지예?…”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남편의 친구 종호 씨가 아는 체를 한다. 주위에서 국제결혼이라도 하라며 성화지만 아직도 총각으로 홀어머니의 걱정을 사고 있다. 허연 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더 많아 어머니와 같이 늙어 가고 있으니 홀어머니의 애가 얼마나 탈까.
종호 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토종벌을 300통까지 키웠다. 그놈의 ‘낭충봉아부패병’으로 빈 벌통까지 싹쓸이 태울 때 마음마저 꺼멓게 타버려 흰머리가 더 늘었다. 원인 모를 괴질이라니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정부 또한 따뜻한 눈길로 어루만져 주지 않았다. 토봉도 벼농사나 다름없는 농사인데 왜 인정을 해주지 않는가 말이다. 속상한 것 생각하면 화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었다. 토종꿀로 한창 잘나갈 때 외국 여자라도 들여앉히지 않은 것이 후회막심이다.
“분봉 좀 하셨어요?”
뻔한 사실에 미안은 하지만 조심스럽게 희망 섞인 말을 건넨다.
“……”

깊은 한숨을 쉬던 종호 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관심이 많으니까 얘기해주는데 ‘강청’인가 저 너머에서 분봉을 했답니다.
겨우 두통이긴 하지만…”
귀가 번쩍, 눈이 번쩍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전멸하다시피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토종벌이 살아있다니. 그리고 분봉까지 했다니 희망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다. 마천농협에서 토봉을 위해 투자한 땀과 돈의 대가이다.
이젠 치료약도 나왔으니 예전 마천 토종꿀의 명성이 돌아올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벌이 못살면 인류도 멸망한다고 했다. 꽃의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태계 질서가 파괴되니 뛰어난 과학도 자연 앞에선 겸손할 수밖에 없다. 자연이 보내는 경고에 숙연히 반성해야 한다.
오늘따라 부모님의 허리를 닮은 다랑이 논의 곡선이 아름답다. 한 달여의 가뭄에도 말라 비틀어진 모가 없이 튼실하게 허리를 쭉 펴고 키를 재고 있다. 그 위 고구마 밭에 고구마순은 제 습성대로 줄기를 뻗어 간다. 감자밭에는 하양·보라의 꽃으로 푸른 잎을 덮고 있고, 쭉 뻗은 초록의 고추는 새 식구를 주렁주렁 매달고서도 흰 별꽃을 연신 피워댄다.
집에 들어서자 마당가 울타리에 넝쿨장미가 주인을 맞는다. 제대로 물을 준 적도 없는데 탐스러운 꽃송이를 피워낸 생명력에 희망이 느껴져 박수를 보낸다. 감자꽃, 추꽃, 호박꽃에 장미꽃이나 봉숭아꽃과 분꽃 등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 꽃들…. 벌이 죽어도, 인간이 절망에 허덕여도 꽃은 계속 피고 진다. 꽃 피는 곳에 벌·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터이다.
이런 생명력이라면 토봉농가에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몇 년 후엔 분봉 철이 되면 여왕벌을 따라 새집을 찾아가는 벌의 무리로 마천의 하늘이 까맣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 벌들의 소리, 마천의 소리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름다운 유월이다.

※필자 백계순: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원, 공단문학회회원,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