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단풍이 설악산에서 삼보 일 배하며 남녘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곧
서리가 내릴세라 청자 빛 하늘을 이고 고구마를 캡니다. 배불뚝이 고랑을 타고 앉아 호미질을 하는 손길이 어느 때보다 넉넉합니다. 고구마를 캘 때는 줄기둘레를 널찍하게 파야 상처를 내지 않습니다. 넝쿨이 무성해서 팔뚝만한 수확을 기대했으나 잔챙이뿐입니다. 올여름처럼 비가 잦아 일조량이 부족한 여건에서는 이만한 수확도 고맙기만 합니다.
이때 어디선가 툭! 하고 가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보나마나 알밤입니다. 밤나무 네 그루에 열린 밤송이가 아람을 벌어 주옥같은 알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도 시원찮으면 밤송이 째 떨어집니다. 호미를 놓고 알밤을 쏟아낸 밤송이를 만져봅니다. 참 신비합니다. 밤나무는 제 새끼들이 잉태하여 성장하도록 거친 밤송이 속에 부드럽고 안락한 아방궁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영락없는 여인의 자궁입니다. 여름내 꼭꼭 숨겼다가 햇살이 영글면 못이기는 척 출산을 합니다.
고구마를 캐다가 알밤을 줍기 시작합니다. 그건 참을 수 없는 유혹입니다. 풀숲에, 꽃밭에, 비탈에 떨어진 알밤을 줍기 위해서는 천하장사도 몸을 구부려 고개를 숙여야 줍습니다. 바람이 한바탕 불고가면 선물이 쏟아집니다. 나는 이 밤을 얻기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퇴비를 주거나 소독을 하거나 심지어는 풀 한포기 뽑아준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밤나무는 풍성하게 보시를 합니다. 밤을 주어보면 손안에 느끼는 중량감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요. 눈을 감고 조용히 밤나무에게 경배를 합니다.
다시 고구마를 캡니다. 제법 큰 것은 줄기 밑에 직립해서 요지부동입니다. 삼형제 사형제가 서로 어께를 겯고 단합된 모습을 뽐냅니다. 이럴 때 긴장합니다. 먼저 제일 큰 놈을 잡고 흔들어 봅니다. 말하자면 타진이지요. 끄떡도 안합니다. 그러면 깔고 앉은 옆구리 흙을 살살 파냅니다. 그리고 또 흔들어봅니다. 이렇게 차례로 캐놓은 놈을 보면 왜 그리 대견한지요. 잘 키운 자식들을 보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우리 자식들도 서로 의지해 험한 세상을 잘 걸어가 달라는 염원의 마음이겠지요.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제비새끼들이 입을 벌리고 엄마 아빠가 물어다줄 먹이를 기다리 듯 이맘때면 우리 자
식들도 고향에서 보내는 택배를 기다릴테니까요. 올해는 모든 게 흉작이라 다섯 상자를 채우려면 진땀나게 생겼습니다.
사실 고구마는 겸손한 식물입니다. 여름내 비닐로 씌운 흙 속에서 묵묵히 자양분을 받아 새끼를 키우지요.
요란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몰아치거나 줄기들을 땅에 부복시키고 그저 제할 일만 합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번듯한 작품을 지상에 올려놓습니다. 배고픈 이에게 한 끼의 행복한 식사가 됩니다. 고구마처럼
가을은 결코 혼자 온 게 아닙니다. 여름이 남기고 간 결과물입니다. 가을 깊어가는 이 나이에 허술하게 보낸 나의 여름을 후회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럼에도 밤나무 아래서, 고구마 밭에서 경배하는 것은 자연이 알려주는 스승다움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들녘에 벼이삭도 산골다랭이 밭에 수수이삭도 너붓이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겸손하고 후덕한 일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을 짧은 해가 서산을 넘을 때면 하늘은 온통 석양입니다. 두 골 이랑은 그런대로 그득합니다. 마음이 먼저 배부릅니다. 담을 그릇을 가지러 뒤란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쇠잔하게 말라버린 오이 덕이 있습니다. 한백년쯤 땅속에 누워 탈골해 버린 모습입니다. 무성하게 잎 피우고 열매 맺어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었던 채소입니다. 오이 덕 앞에서 가만히 합장하고 경배합니다. 그 성스러움에, 한 생애를 아낌없이 소진해 버린 인격체를 봅니다.
가을은 결코 혼자 온 게 아닙니다. 여름이 남기고 간 결과물입니다. 가을 깊어가는 이 나이에
허술하게 보낸 나의 여름을 후회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럼에도 밤나무 아래서, 고구마 밭에
서 경배하는 것은 자연이 알려주는 스승다움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들녘에 벼이삭도
산골다랭이 밭에 수수이삭도 너붓이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생명이 뿌리내리게 해 준 대지에게 햇빛과 비와 바람으로 잘 키워준 위대한 섭리에게, 그리고 고달프게 매달려 가꾸어준 농부에게 바치는 경배입니다. 나도 지금 만추가 되어 천지만물에게 경배하고 싶은 은혜로운 시간위에 있습니다.
※필자 반숙자: 한국수필과 현대문학으로 등단, 국제펜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 수필문우회원 수필집: “몸으로 우는사과나무”외 6권. 제1회 월간문학동리상, 현대수필문학상외 다수를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