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꿈을 꾸다

 함박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시골 풍경은 어머니 품속처럼 안온하다. 더구나 우리마을은 특용작물을 하는 농가도 없고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도 없으니 조용할 수밖에 없다. 마을의 특성을 살려 소득을 위해 연중 농한기가 없는 곳도 많으니 조용한 마을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이런 날 한가함을 즐길수 있어 속없이 좋다. 뒤꼍 대숲도 앞산 소나무도 천천히 흰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한 잔의 국화차로 지리산 한 자락이 거실에 들어선다. 지난 가을 지리산에서 따다 말린 감국 향기 때문이다. 그곳을 한 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이 내게는 은근한 자랑거리다. 지리산을 가끔 내 개인 재산인 것처럼 뻥튀기도 한다. 속으로 마음먹었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으니 이 보다 큰 부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혼자 의기 양양 해 하는데, 팥죽을 쑤어 놓았으니 빨리 회관으로 나오라는 구장댁 큰 목소리에 화들짝 비비새가 날아오른다.
아침 먹고 이것저것 치우고 회사에 출근하듯이 마을사람들은 회관으로 모여든다. 서리태 한 되가 얼마를 하고 들깨 값은 내리고 콩과 팥 값이 올랐다는 이야기부터 어젯밤 감기로 몸살을 앓았다고 필요 이상 엄살을 부리는 동실 아짐과, 서울 아들집에 가서 닷새가 있어야 내려온다는 영천 댁 소식으로 들썩인다. 손자자랑, 며느리 흉, 시어머니 흉을 보다 하루해가 저물고 10원 내기 고스톱으로 하루가 짧다. 김치찌개를 끓여 한 솥에 숟가락을 넣어 먹는 이웃들이다. 농촌의 겉모습은 지금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걱정이 없다.

회관에 출근 하는 것이 싱거워지면 산책을 나선다. 데리고 나선 진돌이는 오랜만에 신이 났다. 제 꼬리를 물고 빙빙 돈다. 지난여름 뙤약볕을 안고 벼를 키우던 논들은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가슴처럼 적막하다. 쌀 한 톨에 땀 한 방울씩 들어 있는 쌀이 자꾸만 천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자 가슴이 서늘해진다. 안이했던 방안에서의 생각들이 눈밭에 찍힌 진돌이 발자국만큼 어지러워진다.
쌀은 이제 이슈가 되지 못한다. 농민이 쌀을 지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다름이 없지만 어디에 목소리를 높여야 제대로 지켜질지 의문이다. 떨어지는 쌀값에 자존심도 떨어진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닌데 새삼 바람이 차고 어깨가 시리다.

어제 시내에서 만났던 지인의 옷이 쌀 일곱 가마 값이었는데 그 옷을 사려면 한 해 동안 서마지기 벼농사를 대신해야 입을 수 있다. 바람소리 따라 그녀의 자랑이 윙윙거린다. 설사 우리에게 그냥 입혀 준다 해도 일곱가마의 쌀 무게에 어깨가 편치 않을 것 같다. 쌀값을 기준으로 모든 생활용품들을 계산했다가는 하루도 버티기 어렵지만 그래도 맑은 공기, 무공해 채소, 사철 공으로 누리는 산과 들이 있어 위로가 된다.

어제 시내에서 만났던 지인의 옷이 쌀 일곱 가마 값이었는데 그 옷을 사려면 한 해 동안 서마지기 벼농사를 대신해야 입을 수 있다. 바람소리 따라 그녀의 자랑이 윙윙거린다. 설사 우리에게 그냥 입혀준다 해도 일곱 가마의 쌀 무게에 어깨가 편치 않을 것 같다. 쌀값을 기준으로 모든 생활용품들을 계산했다가는 하루도 버티기 어렵지만 그래도 맑은 공기, 무공해 채소, 사철 공으로 누리는 산과 들이 있어 위로가 된다. 아니 그 보다 동고동락 할 다정한 이웃이 있어 괜찮다. 다행히 우리 마을은 빈집을 사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니 앞날이 그리 어두운 것만 아닐 것으로 기대한다. 찾아와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드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다.
겨울새 몇 마리가 오룡산을 넘는다. 다섯 마리 용이 산다는 오룡산을 근원으로 우리 마을은 형성되었다. 40년을 살았지만 용이 승천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 60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는 상서로운 흑룡띠 해를 맞았다. 달력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하나같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 용은 여전히 사람이 닿을 수 없는 행운의 상징이다. 용꿈을 꾸면 복권을 사고, 소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사람마다 꿈꾸는 희망이야 다르겠지만 오늘밤 나는 집집마다 여의주 대신 쌀 한 가마씩 물고 하늘로 승천 하는 꿈을 꾸고 싶다.

※필자 형효순: 한국농어촌여성문확회 회장 역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수필집「재주넘기 30년」이 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