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호 구례우리밀영농조합법인 대표
전국에서 모내기가 한창인 6월이면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은 온통 황금 들판으로 뒤덮인다. 바람을 따라 출렁이는 아름다운 황금빛 우리밀이 착하게 익어가는 풍경이다.
우리밀이 다시 들판에 너울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성호 구례우리밀영농조합법인 대표(제19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가 구례군에 우리밀 종자를 심기 시작한 20여 년 전이 그 시작이다. 최성호 씨는 농민운동 1세대로 농어업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많은 일을 해왔다. 그는 어촌계를 조직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바로 앞바다인데 약삭빠른 외지사람들한테 빼앗겨서 정작 어민들은 자기 집 앞 바다에서 꼬막을 못 줍는 거요.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어촌계를 조직, 5년 재계약 시점에 바다 조업권을 어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카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잡혀 들어가기’를 수십 번 했다는 최성호 씨. 그나마 카톨릭단체였기 때문에 활동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1990년, 그는 농민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한국가톨릭 농민회 1세대들이 모여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답게 사는 운동을 펼치자고 결의하면서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도시와 농촌이 더불어 사는 운동, 둘째, 친환경농산물 생산과 같은 생명운동, 셋째, 우리밀살리기운동이었지요.”
최성호 씨는 고향인 구례로 내려왔고, 우리밀 종자 14kg을 200평 밭에 파종했다.
“종자 30만 가마만 확보한다면 어떤 식량 위기가 와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향으로 내려와 우리밀을 심다
1984년 정부의 밀수매가 중단되면서 우리밀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국산 밀가루값의 1/6이 안되는 수입 밀가루 350~400만 톤(1억 가마)이 밀어닥친 지 7년, 농민들이 파종조차 하지않아 그야말로 우리밀의 씨가 말랐다.
“그 당시 오이를 재배하면 평당 5만원의 수익을 올리지만 밀은 1500원이었어요. 당연히 농민들이 밀 생산을 안 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다면 그가 광의면에서 우리밀을 계속 늘려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농민운동을 하면서 변화는 교육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밀을 왜 생산해야하는지 농민들을 설득했지요.”
생산을 하고 나니 우리밀을 가공할 곳이 필요했다. 그는 대규모의 제분시설이 아닌 ‘적당한’ 규모의 시설을 찾았다.
십시일반으로 우리밀 가공공장이 서다
“옛날 물레방앗간 같은 작은 제분시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그 흔적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본도, 제분 지식이나 경험도 없었던 터라 고민하던 중에 전남도청에서 1읍면 1특품사업단 사업이 있어 신청했지만, 우리밀은 특품사업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통지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설득과 호소 끝에 총 1억 4천만 원, 자부담 5천만 원의 사업비로 창고 200평, 제분시설, 국수기계, 누룩기계등을 들여놓고 우리밀 가공공장을 설립했다.
“자부담 5천만 원을 만들어내기 위해 조합원들이 십시일반으로 50만원, 100만원씩을 투자했고
그것조차 어려운 조합원들은 직접 시멘트를 짊어지고 돌을 나르면서 인건비를 대신해 출자금을 만들었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가공 공장이고 그래서 구례우리밀 가공공장은 농민이 주주다.
그렇게 만든 우리밀공장의 분쇄기로 통밀가루를 생산하여 전국 우리밀살리기운동 본부에 납품했지만, 밀가루의 찰기가 부족하고 거칠어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외국의 어마어마한 가격의 분쇄기의 성능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
밀 살리기 운동이 밀 산업으로
그래도 우리밀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면서 구례, 무안, 합천, 정읍, 아산 등 5곳에서 우리밀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7년 IMF로 공장들이 모두 폐쇄되었고, 구례공장만 회원들의 힘으로 생산, 가공, 유통까지 제2의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2002년 2500가마, 2003년 5000가마의 우리밀이 다시 생산되었다. 지난 2007년 시설을 현대화하고 규격화 하여 1년에 10만 가마(40kg 기준)의 밀가루를 제분할 수 있게 되었고, 밀가루 품질을 향상시켜 수입밀과 경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대규모 제분시설은 수입밀을 제분하고 다시 우리밀을 제분하여 밀이 섞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밀 공장은 순수하게 우리밀만 가공하는 전국 유일한 공장이다. 우리밀 공장이 농촌 지역에 들어서자 농촌 경제가 활발해졌다. 15명의 젊은이들에게 든든한 일터를 주었고, 구례농민 400명과 수매 계약을 체결하여 농민들이 맘 놓고 밀 생산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곡물 생산은 자원입니다. 햇빛, 공기, 물, 흙, 노동력이 적절히 제공되면 농민들은 곡물을 얻고 이득을 창출하게 됩니다. 농민들의 소득이 높아지면 소비도 늘고, 지역경제를 발전시키게 되지요.”
이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우리밀 산업에 대기업까지 가세했다. 농민과 소비자의 힘으로 어렵고 힘겨웠던 우리밀살리기 운동이 당당히 우리밀산업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정부는 밀산업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래서 애써 이뤄놓은 1%의 기반이 불안한 것이다.
농업의 목표는 자급, 농민이 살아야 지역경제가 산다
“농업의 목표는 자급입니다. 낮은 농산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입농
산물을 들여오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식량주권은 위협을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수입농산물로 우리 농민들이 어려워지면 그 지역사회의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올해 전남지역 초등학교 200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살기 힘드니까요. 젊은이들은 떠나고 농촌은 고령화되면, 먹을거리를 수입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 소비자 역시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위협을 받게 되겠죠.”
우리밀 공장 이익의 10%는 생산농민들에게 돌려주고, 지역사회 나눔 활동에 사용한다는 최성호 씨.
단순히 밀가루 생산 공장이 아니라 농민의 땀과 희망, 정성을 담아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함으로써 도농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농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 먹고사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아직 우리밀의 점유율은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성호 씨는 이 1%의 가능성이 튼실한 씨앗이 되어 100%의 희망으로 활짝 펼 수 있는 미래를 확신한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를 위해 그는 아직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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