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이장부부의
‘달콤 살벌 시골살이’

백승우·이현정 오늘농장 대표

38내비게이션 안내는 종료되었는데, 막다른 군부대 앞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하니 백승우 씨(47)는 제대로 찾아왔다며 웃었다. 부대 옆 샛길 사이로 전화를 받고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 였던 백승우 씨는 15년 전 강원도 화천군 용호리에 정착했다. 집 앞의 비가림 하우스와 3천여 평의 밭에서 유기농 고추, 감자, 애호박 등을 재배하면서 마을 이장을 맡아 일하며, 강의도 하고 집필도 한다. 얼마 전 『까칠한 이장님의 귀농 귀촌 특강』을 펴냈다. 이른바 ‘반농반Χ’(지속가능한 농업에 생활의 터전을 두고 자기의 재능을 살려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일_편집자 주)의 삶이다.

도시 때를 벗고 시골로
아내 이현정 씨(47)와는 환경, 생태, 여성학 등을 공부하는 대학모임에서 만났고, 졸업하고 각자 39광고 회사와 출판사에서 소위 ‘잘나가는’ 엘리트로 살다 결혼에 이르렀다. 백승우 씨는 결혼한 해 겨울, 귀농을 결심했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고민이 있었죠. 가치관대로 살지 못하니 재미가 없더라고요. 결혼하자마자 귀농을 알아봤어요.”
백승우 씨의 이야기를 듣던 이현정 씨가 “그러니까 완전 사기이고 배신”이라며 웃었다. ‘귀농’이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하던 시기였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떠난 것은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에너지부터 식량까지 어느 하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도시 중심의 현대문명을 벗어나 농촌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귀농학교에서 배운 생태적 삶을 직접 체험해보고자 전남 화순에 1년간 머물렀다. 그는 이 시기를 “도시 때를 벗는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야생 찻잎을 따서 덖어 마시고, 한옥을 직접 짓고 천연염색도 하고 곶감도 만들며 ‘시골에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본’ 시간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혼자서는 못 산다 _ 그의 이야기
백승우 씨는 “시골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혼자서는 못 산다”고 말한다. 생태적 가치를 가지고 귀농했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을에 시설이 좋은 A병원과 유명 의사가 있는 B병원, 가격이 착한 C병원이 있다고 칩시다. 농촌 어르신들이 어느 병원을 찾을까요?”
그가 물었다. 답은 ‘아는 사람이 있는 병원’이란다. “농촌 사회는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몇 대를 이어 알고 지낸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며, 귀농이란 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고 땅 가격도,집의 형태도, 본인의 가치관도 다 중요하지만, 그 지역에 이미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없이는 귀농도 없다는 이야기다.
“처음 용호리에 왔을 때 마을 형님이 자기 아이들 공부 좀 가르쳐달라고 하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단칼에 거절했겠죠. ‘그게 진정한 교육이 아니거든’하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을 거예요. 그게 전부가 아니란 생각에 순순히 가르치겠다고 했어요.”
백승우 씨는 동네 아이들 공부도 가르치고, 마을일도 돕고, 농사 규모도 조금씩 늘려가면서 천천히 마을에 녹아들었다. 토박이끼리 풀기 어려운 갈등에 중재 역할을 했다. 이렇게 조금씩 사람 사이로 녹아들자 ‘마을 이장’이라는 감투가 찾아왔다.40

어렵지만 재미있는 시골살이 _ 그녀 이야기
마을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물으니 이번엔 이현정 씨가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그녀가 시골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늘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살았던 이 씨에겐 부부가 모든 것을 함께하고 ‘누구의 아내’로 지내야하는 시골살이가 녹록지 않았다.
“농촌에서는 모든 일을 부부가 함께해야 해요. 행사를 하면 당연히 부인들이 음식 하는 걸 전제하니까. 마을 잔치할 때도 ‘이장 마누라는 왜 안 보이냐’고 물어보시기 때문에 설거지라도 하지요.”
본격적인 귀농, 그러니까 화천으로 들어온 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고 애를 많이 썼다.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은 매번 힘들었다. 한 1~2년은 어깨며 등이 밤마다 아팠다고 한다.
“지금은 힘들긴 하지만 재미도 있어요. 할머니들과 같이 일하면서 오랫동안 농사지어온 지혜도 듣고, 재밌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이현정 씨는 시골살이에 적응할수록 재미있는 것이 늘어간다고 했다. 벌써 튤립 싹이 올라왔다며,날씨가 더 풀리면 정원을 가꾸느라 바쁠 예정이라 했다.

귀농 귀촌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러나
“시골의 삶은 저절로 가난해지는 삶입니다. 도시는 소득이 늘어나는데 시골은 똑같은 자리에 있기도 힘들지요. 소득은 후퇴하고 육체적으로 힘도 약해지는 겁니다. 귀농 귀촌은 현실적으로 힘들어요.”
까칠한 이장 백승우 씨는 귀농 귀촌은 권장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조를 받는 농가만
효율성이 극대화되고 소농들은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농업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정부의 농업정책이 효율적일수록, 개혁될수록 소농은 점점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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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 제대로 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적정한 가격에 우리 농산물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고, 농민의 소득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단가를 맞출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민의 기본 소득 보장이 필요합니다.”
나라가 농민을 기본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을 비롯한 농업선진국의 정책이기도 하다.

긴 겨울은 기어이 가고 봄이 왔다. 백승우 씨와 이현정 씨는 한해의 농사를 준비한다. 백승우 씨는 토종 종자 콩과 옥수수를 심어서 직거래할 생각이며 집필과 강의도 열심히 할 생각이다. 이현정 씨는 200평 텃밭에 갖가지 채소를 키우며 틈틈이 번역과 통역도 할 것이다. 따로 또 같이, 지속 가능한 농촌에서의 삶을 꿈꾼다.

김병훈  사진 김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