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봄, 생명의 농장

뉴질랜드 ‘카오스 스프링스’ 농장

Ⓒ대산농촌재단
Ⓒ대산농촌재단

우리가 탄 버스가 멈췄다. 깊은 산골의 작은 다리 앞. 맙소사. 1차선 다리였다. 반대편에서 작은 승용차가 다리 위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남한 땅의 두 배가 넘는 국토에 겨우 4백4십만 명이 산다. 빈 땅이 즐비한 넓디넓은 나라 뉴질랜드. 멀쩡한 2차선 길도 버리고 농지를 뭉개 4차선을 마구 뚫는 나라에서 온, 통이 큰 사람들 눈에는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달러인 부자 나라의 낡은 1차선 다리가 참 경이로웠다.
이번에는 길을 건너는 소 때문에 다시 버스가 섰다. 건널목이 아닌데도 소의 보행권이 우선인가? 동물 한 마리당 3천 평이 넘는 풀밭을 가진 낙농국가답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강물은 빠르게 흐르다가 불쑥불쑥 폭포를 이룬다. 버스가 속도를 내지 않는 것은 좁은 산길 탓은 아닌 듯하다. 친절과 여유가 몸에 밴 운전사는 과속을 모른다.
드디어 ‘카오스 스프링스 농장Chaos Springs Farm’에 도착했다. 생명역동농업을 하는 곳이다. 캠브리지를 출발하여 2시간 넘게 걸렸다. 뉴질랜드 4대 도시이자 인구 18만의 대도시(?) 해밀턴 외곽을돌아 모린스 필과 타투아누이를 거쳐 와이타헤타 강을 끼고 왔다. 농장은 동쪽 해변도시 와이히로 가는 길에 있었다.

스티브 에릭슨과 제니 에릭슨. 미국 유타 주에서 20년간 채소 농사를 짓다 뉴질랜드로 왔다. Ⓒ대산농촌재단
스티브 에릭슨과 제니 에릭슨. 미국 유타 주에서 20년간 채소 농사를 짓다 뉴질랜드로 왔다.Ⓒ대산농촌재단

정농회와 생명역동농법
연수를 오기 전부터 현대식 농업국가인 뉴질랜드에서 생명의 농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관심이 컸다. 산업화에 따른 현대농법의 문제가 다방면으로 드러나면서, 태평농법이다, 자연농법이다, 생명의 농사다 하며 대안의 농법을 찾아 나선 뜻있는 농부들의 대열에 일찍이 합류한 덕분이다.
22년 전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야마기시농장 공동체를 거치면서 경천애인(敬天愛人-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사랑함)의 진리를 농업으로 일구는 ‘정농회’에 가입했다. 그러면서 자연예술농법도 접했고, 영성농법 강의도 들었다. 자연과 사람이 같이 사는 길을 찾기 위한 시도였다. 그중에 생명역동농법의 매력은 우주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이다. 달과 별의 움직임까지 살펴서 농사에 적용한다. 같은 철에 재배하는 작물도 뿌리작물이냐 잎 작물이냐에 따라 씨를 뿌리는 시기가 엄격히 구분된다. 당연히 수확하는 시기도 그믐과 보름을 따진다. 작물과 우주기운과의 관계 때문이다. 사람도 남자는 화성의 기운, 여성은 금성의 기운이라 한다.
현대 농법이 작물을 그 농장의 물, 온도, 영양, (인공)빛 중심으로만 바라본다면 자연농과 유기농은 지역 단위 삶의 공동체와 지구차원의 사고를 한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계, 나아가서 은하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농사에도 적용하여 농사달력까지 만들어 낸 것이 생명역동농법이다. 우리전통의 오운육기력이나 음양오행 원리와도 서로 통한다. 초끈이론으로 표현되는 현대양자물리학과도 연결된다. 미시세계와 우주공간을 농사에 흡입하는 것이다. 미시세계의 혼돈은 기다란 원형 끈의진동에서 비롯된다.

“혼돈이 창조의 바탕이다”
이같이 약동하는 혼돈 상태가 모든 창조의 바탕이다. 계절로는 봄이다. 창조 중에 생명보다 더 큰창조가 없다고 할 때 ‘카오스 스프링스’라는 이름은 생명역동농장답다.

카오스 스프링스 농장에서는 생명역동농업을 토대로 유기퇴비를 제조하 고 교육한다. Ⓒ대산농촌재단
카오스 스프링스 농장에서는 생명역동농업을 토대로 유기퇴비를 제조하고 교육한다. Ⓒ대산농촌재단
증폭제를 만드는 회전기계 등 다양한 장치를 이용해 건강한 농사를 짓고 있다. Ⓒ대산농촌재단
증폭제를 만드는 회전기계 등 다양한 장치를 이용해 건강한 농사를 짓고 있다. Ⓒ대산농촌재단

생명역동농법은 요즘 유행하는 통섭학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전인적인 사람이었다. 농사의 본령이 그러하듯 그는 화학, 물리, 철학,농학, 교육학, 문학까지 아우르고 300권 이상의 책을 썼다. 기상학과 토양학, 화학지식만으로 농사를 짓는다면 초급 농부다. 최소한 여기에 문학과 정신과학(명상)을 덧붙여야 참 농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은세상 만물과 소통하는 통로다.
정농회 교육을 받으면서 농장의 세 귀퉁이에 거리를 정확히 재가며 숯을 묻기도 했고 농장에서 시를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증폭제(생명역동농법의 발생지인 독일에서는 ‘예비제’라고 한다. 일본은 ‘조합제’)를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효과를 제대로 본 것은 논에다가 목성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같은 화본과의 대나무나 버드나무 가지를 꽂았던것이다.
갈대도 화본과라 닥치는 대로 베어 넣었다. 우렁이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었는데 병도 없이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 이른 봄에는 따뜻한 기운을 모으기 위해 붉은 천을 대나무 가지에 걸었다. 도열병이 올 수 있는 한여름과 늦여름에는 청색 천을 걸었더니 무당집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알록달록 예뻤다.
사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합 농업 기술서 <제민요술>과 조선 후기에 임원경제지를 쓴서유구의 책 <행포지>에도 생명역동농법과 유사한 농법이 등장한다. 말똥을 삶아 씨앗을 담근다든가 누에똥에 씨앗을 섞어 겨울동안에 보관하라는 것 등이다. 말뼈를 물에 넣고 3번 끓였다 식히기를 반복하고는 바꽃 뿌리를 넣어 파종전에 뿌리라는 얘기는 <범승지서>라는 농서에 나온다. 생명역동농법의 증폭제와 유사하다.

증폭제와 식물추출물 등 다양한 장치와 재료들
이번에 가서 본 카오스 스프링스 농장은 내가 했던 것보다 규모도 크지만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었다. 농장이 50헥타르나 되었다. 스티브 에릭슨과 아내인 제니에릭슨이 함께 꾸려가고 있다. 유쾌하고 친절한 부부였다.
집 앞에 정8면체로 조성된 밭이 있었다. 처음엔 미스터리 서클 같았고 곧이어 우주의 본체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 열심히 관계를 맺었던 명상수련 단체인 ‘수선재’에서는 우주 형상을 본떠서이와 같은 팔문원이라는 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정8면체 밭은 중심에서 각 면의 꼭짓점까지 선을 긋고 골을 내서 모두 8개의 이등변 삼각형의 밭을 조성해 놓았다. 여기에는 각기 다른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주역의 4상 8괘가 떠올랐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이 농장은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이 건강한 토양이었다.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 농사의 근본이라고 정농회에서 배웠는데 이 농장에 와서 그것을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거름 만들기와 증폭제 만들기,파종 시기와 수확 시기 등은 모두 땅의 건강성을 고려한 것들이다.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내세우는 원칙도 건강한 식물, 건강한 동물, 그리고 ‘수익을 내는 농장’ 등이었다. 수익을 내는 농장을 에릭슨이 강의하면서 설명을 해 주니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흔히 자연과 하나 되고 하늘 섭리에 따르는 농사 운운하면 “그래가지고 먹고 살 수 있냐?”는 반박을 하도 많이 들어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각종 식물성 추출물(액상 비료)을 만들어 쓰는 것과 증폭제를 만드는 회전 기계였다. 식물 추출물을 만드는 장치도 다양했다. 사람 키만큼 큰 깔때기 모양의 플라스틱 통 아래쪽에는 꼭지를 달아서 식물즙이 고여 있게 했다가 일정하게 발효가 진행되어 질 좋은 추출물이 생기면 빼내는 식이었다. 적어도 1톤은 됨직한 스테인리스 물탱크에는 빗물도 안 들어가게 공기구멍이 달린 뚜껑을 덮어 놓은 것도 있었다.
증폭제를 만드는 회전기계도 아주 맘에 들었다. 김준권 전 정농회 회장 집에 있는 회전기를 본 적이 있는데 여기 회전기는 깨끗한 스테인리스라서 주물 제품인 김 회장 것보다는 고급스러워 보였고 잡티가 안 생길 듯했다. 그렇게 해서 원심력으로 물이 가장자리로 다 몰리면 전동기는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돌았다. 회전기의 힘도 셌고 규칙적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증폭제 회전기를 보니 그 옛날 초짜 농부 시절에 대나무 빗자루를 드럼통 증폭제 속에 넣고 한 시간을 좌우로 번갈아 젓느라 팔이 빠질 것 같았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지렁이가 자라는 거름은 평화를 지킨다?
카오스 스프링스 농장에서는 활용하는 자원이 아주 다양했다. 분뇨와 분쇄목, 동물과 동물사체, 점토 산림토양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자원이다. 동물사체는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프레젠테이션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지렁이를 비롯한 다양한 미생물을 이용해 퇴비를 만든다. Ⓒ대산농촌재단
지렁이를 비롯한 다양한 미생물을 이용해 퇴비를 만든다.Ⓒ대산농촌재단

바닥에 막을 깔고 60센티미터쯤 촉촉한 거름을 쌓고는 가운데에 동물의 사체를 놓는다. 그리고는 분묘처럼 동물의 사체 위로도 봉긋하게 60센티미터 이상의 거름을 덮는다. 그렇게 하면 밑면의 지름은 거름 더미의 높이보다 넓어지게 된다. 반년이면 동물의 사체는 다 분해되어 좋은 거름이 된다고 했는데 거름을 뒤집다가 부패 중인 사체를 보면 무서울 것 같았다.
밭 주변의 어떤 통에는 지렁이만 키우는 중이었다. 들녘 출판사에서 나온 <흙속의 보물 지렁이>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렁이를 본격적으로 키우는 그 통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음식물 남은 것과 각종 섬유질 풍부한 식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지렁이도 판매한다고 했다. 지렁이는 쟁기 노릇도 하지만 똥인 분변토는 질 좋은 거름이 된다. 사람 똥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놀라는 표정이었다. 위생상 쓰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 똥이 거름으로 최고인데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문화가달라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작물을 키우기 위해 인간은 질소 확보에 혈안이 되어 왔다. 18세기 중반에는 페루 앞바다에 새들의 똥이 수천 년 쌓여 만들어진 ‘구아노’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벌였다. 급기야는 공기 속의 질소를 고정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그 기술은 폭탄을 만드는 기술과도 연결되어 수많은 인류를 살상했다.
농사와 전쟁. 안 어울리지만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식량이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시대다.
생명역동농법에서는 똥과 짐승 뿔, 쐐기풀, 톱풀, 카밀레, 상수리나무 코르크 껍질 등으로 증폭제를 만들어 몇 배의 농산물을 생산한다. 생명역동농법을 여러 농법 중 하나가 아니라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여겨도 될까?

25-2※필자 전희식: 농부, 귀농하여 자연재배 농사를 짓고 있다. 전국귀농운동본부와 정농회에서 활동했다. 저서 『똥꽃』(2008, 그물코), 『땅살림 시골살이』(2011, 삶이보이는창), 『시골집 고쳐살기』(2011, 들녘), 『아름다운 후퇴』(2012, 자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