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현 미실란 대표
곡성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온통 황금 들녘인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또 10월이구나 생각했다. 곡성역에서 차로 5분. 미실란에 도착하니 지난해 이맘때가 생각났다.
제24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이동현 대표의 공적 영상을 찍는 중이었다. 이 대표가 갑자기 “내 짝꿍(아내 남근숙 씨)한테 상을 주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그 표정이 꽤 진지해서 잠시 할 말을 잊었던 것 같다. 그는 “같이 고생했는데 혼자 상 받기가 미안하다”며 웃었다.
발아현미로 우리 쌀의 가치를 높이다
2005년, 이동현 대표는 일본에서 미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고도 없는 곡성군의 한 폐교에 자리를 잡았다. 미실란이라는 이름으로 농업회사를 만들고 287종의 벼 품종을 직접 재배하면서 쌀 품종연구를 해왔고, 이를 토대로 2007년 농촌진흥청 식량과학원과 함께 발아현미에 맞는 품종 연구를 하여 최적 품종인 삼광벼를 선발했다.
발아현미는 현미에 적정한 수분과 온도를 공급해 1~5mm 정도 싹을 틔운 것으로, 현미의 영양과 기능을 살리면서도 부드러운 밥맛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기능성이 알려지면서 시중에 많은 발아현미제품이 나왔지만, 발아율에 대한 기준이 없어 대부분 발아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동현 대표는 우수한 품종을 바탕으로 발아율 95%, 쌀알이 깨지지 않는 완전미율 90%이상이면서 냄새가 없는 우수한 발아현미 제조기술을 개발해 우리나라 발아현미의 안정성과 품질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0년의 시간과 노력이 만들어 낸 성과다.
10년의 약속, 다시 10년
1년 만에 다시 찾은 미실란은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발아현미와 다양한 쌀 가공품을 생산하는 농업회사 미실란을 중심으로 농가식당인 밥카페 ‘반하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파머스 캠프’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협력하는 조직으로 개편하는 중이라 했다.
“10년 전 농업과 지역을 함께 고민하겠다는 마음으로 곡성으로 왔고, 좋은 발아현미를 생산하기 위해 농민과 계약 재배를 하며 상생해왔어요. 그런데 농민이 생산한 쌀을 수매하는 건 미실란이 엄청 커지기 전엔 한계가 있어, 지역을 위해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앞으로 10년을 생각한 거죠.”
파머스 캠프, 소농들의 디딤돌이 된다
“그동안 지역에서 만난 인재들이 많았어요. 이 인재들과 ‘우리가 지역을 위해서 할 일을 함께 도모하자’고 시작한 게 협동조합 ‘파머스 캠프’입니다.”
파머스 캠프는 일종의 농민 시장이다. 밥카페 ‘반하다’ 옆 공간을 이용해 판로를 찾지 못한 소농과 귀농인의 농산물과 가공품을 판매한다. 일손이 없고 인건비도 비싸 과수원에서 그냥 버려지는 낙과도 수집해서 가공해 즙으로 판매한다. 올해 처음 사과 300kg을 사서 가공했다.
“농민에게는 적정한 값을 지불하고, 파머스 캠프에서는 이것을 HACCP 시설에서 가공합니다. 생산 이력을 철저히 관리하구요. 이렇게 하니 농민도 좋고, 공장관계자도 좋고, 파머스 캠프와 미실란도 상생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가게 되었죠. 미실란의 영역이 확장되는 느낌입니다.”
이동현 대표는 10월 말에 여는 미실란 음악회 ‘농부 마르쉐’를 시작으로 주말마다 장터를 열어 소농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계획이다.
밥카페 ‘반하다’, 시골로 밥만 잘 먹으러 오더라
미실란에 농가식당을 연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부분 “망한다” 였다고 한다. ‘이런 시골에 누가 밥을 먹으러 오냐’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연지 일 년여. 작고 아담한 밥카페 ‘반飯 하다’는 ‘농부가 차린 밥상’, 로컬푸드, 유기농, 발아오색쌀을 키워드로 한 곡성군의 명소가 되었다.
너른 들녘을 바라보며 건강하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고, 이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는 곳. 밥카페 ‘반하다’는 단순히 밥만 먹고 가는 식당의 의미를 넘어 생태와 사람과 문화가 공존하며, 치유와 소통이 이루지는 공간, 그리고 지역 농촌과 지역민을 위한 일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기적은 선한 사람들의 만남으로 일어난다
미실란에서 봄과 가을에 열리는 작은 들판 음악회. 2006년 아내 남근숙 씨가 지역민들과 함께 시작한 것이 벌써 15회를 맞았다.
“획일적인 축제 말고, 아이들이 소외되는 축제 말고 우리끼리 노는 문화를 만들어보자 했어요. 처음엔 바이올린을 켤 줄 안다는 애들 데리고 오고, 이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교장 선생님도 나오고…. 참 어설펐죠. 그런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음악회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다 봄과 가을 두차례로 늘었고, 이제는 사람들의 재능기부와 적극적인 참여로 지역민의 축제가 되었다. “우리는 공간을 내어줄 뿐”이라고 이 대표는 말한다.
10월 29일, 올해는 규모가 더욱 커졌다. ‘미실란 들판 문화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들판 음악회와 함께, 논길이 ‘런웨이’가 되는 “슬로패션쇼” 도 함께 열린다.
“사실 지금 우리 부부는 삶 자체가 하루하루가 기적이에요.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살아낼 수 있었다는 거. 힘들다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동현 대표는 선한 사람들이 모여 기적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 피우는 곳” 미실란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난다.
글 신수경 편집장 / 사진 김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