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데칸고원 안에 자리 잡은 안드라프라데시 주Andhra Pradesh 메닥 지역. 이곳 농민 자야파(55)는 ‘달리트’다.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분류되는 힌두교의 4개 카스트 계급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을 뜻한다.(수천년간 이어온 인도의 신분제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아직도 관습으로 남아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_ 편집자 주)
지난 8월 메닥의 마치누르 마을을 찾았다. 마을 곳곳엔 법전을 안고 있는 암베드카르 동상이 서 있었다. 초대 수상 네루에게 발탁돼 인도 헌법을 만든 달리트 출신 정치가다. 평생을 인도 독립과 달리트 인권, 카스트 철폐 운동을 벌여 ‘달리트의 아버지’로 불린다. 예컨대 달리트들이 차별 없이 원하는 곳 어디서든 살 수 있도록 인도 헌법으로 보장된 것은 전적으로 암베드카르 덕분이다. 하지만 그 두꺼운 책자는 이상일 뿐, 현실일 수 없었다. 자야파 역시 달리트란 이유로 카스트 계급들이 사는 마을 안에 집을 지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자야파는 마을 밖에서, 안에 사는 지주들의 땅을 부치며 소작농으로 살았다.
1970년대 중반 인도 농촌은 ‘녹색혁명’의 바람이 불었다. 농업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달리트 출신 소작농인 그에겐 먼나라 이야기. 당시 인도에서는 농산물 가격을 보장하라는 지주들의 운동과 달리트들에게 충분한 소작료를 지급하라는 달리트 운동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 농민운동의 영향으로 1980년대 초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는 달리트들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땅이 제공됐다. 다만 제공된 집터가 마을 안에 있다는 게 문제. 자야파네 등 4가족이 머물 수 있는 4채의 집이 지어졌지만 마을 사람들은 달리트가 마을 안에 사는 것은 ‘금기’라며 집을 부수었다.
달리트들은 남아있는 집 한 채를 4개의 방으로 개조했다. 마을 사람들이 또 집을 부술까 인근에사는 달리트 80여 명이 모여 주변을 지켰다. 불가촉천민들이 떼로 모여 있는데 집을 부수겠다며 나서는 간 큰 주민들은 없었다.
자야파가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의 큰 나무에는 신발이 걸렸다. 인도에서 남에게 신발을 던지는 일은 가장 큰 모욕 중 하나다. 나무에 걸린 신발은 땅을 가진 농민 누구라도 마을 안에 사는 달리트들에게 소작을 맡길 경우 신발 맞을 각오를 하라는 무언의 경고다. 자야파와 다른 달리트에게 일거리를 주는 농민은 없었다. 대신 달리트들은 무너진 집터를 개간해 잡곡을 키우고 가축을 길렀다. 그들 뒤엔 80명의 달리트가 있었으니 누구도 그 땅을 넘보지 못했다. 그때부터 달리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현안을 논의하고 대소사를 함께 결정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들어와 산 지 3년. 정부에서 달리트들에게 농지를 제공했다. 돌 많고 좋지 않은 땅은 2에이커, 좋은 땅은 1에이커. 자야파는 붉은 흙이 날리는 땅에 뭘 심으면 좋을지 동료들과 논의했다. 밭에는 ‘파차조나(Pacha jonna·수수)’, ‘코라(Korra·조)’, ‘사자(Sajja·수크령)’ 등을 심었다.
달리트들은 점차 부유해졌고 메닥 지역을 중심으로 달리트들의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암베드카르 동상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그렇게 메닥 지역 75개 달리트 마을 공동체로 이뤄진 데칸발전협회(DDS; Deccan Development Society)가 생겼다.
땅을 소유한 달리트 농민들, 정확히 말하면 달리트 남성들은 마을 회의 때마다 “비료 살 돈을 지원해달라”, “농약 살 돈을 지원해달라”, “가축을 지원해달라”며 요구하는 게 많았다. DDS에서 농민에게 염소 살 돈으로 100만큼 지원하면 50으로는 삐쩍 마른 나이든 염소를 사거나, 염소를 사지 않고 빌리고는 나머지 50으로는 술을 사 마셨다. 술 마시고 아내를 때리는 일도 잦았다.
인도에서 아내는 사실상 남편의 ‘소유물’이다. 여성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고 땅을 소유할 수도 없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다우리’제도라는 악습이 있어 여성들이 결혼할 땐 엄청난 금액의 지참금을 마련해야 한다. 인도에서 10학년까지는 의무교육이지만 10학년까지 학교에 다니는 건 여성들, 특히 달리트 여성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대학은 언감생심. 집안 기둥을 뽑을만한 정도의 돈을 주고 딸을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부모가 딸의 대학 진학을 반길 리 없다. 이 때문에 딸을 임신하면 낙태하거나, 딸이 어릴 때 돈을 받고 나이든 남자와 결혼시키는 집안도 있다. 인도에서 가장 힘없는 ‘달리트’의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DDS에서도 여성들은 가진 것 한 푼 없이 ‘남편들의 땅’에서 온종일 일만 했다.
인도에서 아내는 사실상 남편의 ‘소유물’이다. 여성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고 땅을 소유할 수도 없다.
인도에서 10학년까지는 의무교육이지만 10학년까지 학교에 다니는 건 여성들, 특히 달리트 여성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도에서 가장 힘없는 ‘달리트’의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DDS에서도 여성들은 가진 것 한 푼 없이 ‘남편들의 땅’에서 온종일 일만 했다.
DDS는 가축 전수조사를 했다. 많은 달리트 남성들이 돈을 뒤로 빼돌렸다가 들켰다. 마을 구성원들은 DDS 지원금을 남편이 아닌, 아내에게 주기로 했다. 발상은 단순했다. ‘적어도 여자들은 지원금을 뒤로 빼돌려 술을 사 마시지는 않겠지…’, ‘지원금을 낭비해도 적어도 자기 가족을 위해 쓰지 않겠냐’는 생각. 여성들이 지원금을 관리하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DDS 내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의 DDS는 사실상 여성 농민들이 이끌고 있다.
마치누르 마을에는 ‘비타날라 비양크(Vittanala Bank·종자은행)’가 있다. 농사 경험이 풍부한 이웃 마을 주민 산드라마(60)를 은행장으로 앉혔다. 산드라마는 수확 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좋은 종자를 수집한다. 한번 수집한 종자는 3년간 보관하는데 살균 효과가 있는 님나무 잎을 함께 넣어둔다. 산드라마는 “20년 동안 모은 씨앗만 85가지”라고 말했다.
‘녹색혁명’ 이후 인도 농민들은 생산성 좋은 글로벌 기업들의 종자를 시장에서 산다. 한국 농촌처럼 토종종자는 점차 사라지고 종자기업의 단일 종자가 시장에서 거래된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직접 보관한 종자를 심거나 산드라마의 종자은행에서 빌린다. 1㎏의 씨앗을 빌리면 수확 뒤에 2㎏의 씨앗으로 갚는다.
마을 주민 데잠마(45)는 3에이커(3673평)의 땅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 이중 1에이커는 24~25종류의 작물을 심었다. 데잠마는 “가족들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종류의 잡곡을 심는다”고 말했다. 나머지 2에이커는 ‘칸둘루(Kandulu·비둘기콩)’를 심었다. “요즘 칸둘루가 가격이 좋지, 3배나 올랐거든.” 칸둘루도 변종을 함께 심었다. 이 지역은 토지가 물을 많이 머금지 못하는 곳이라 물을 많이 쓰는 작물은 꺼린다. 이 지역토종 종자들은 건조한 곳에서 잘 자란다. 시장에서 팔리는 종자보다 종자은행이나 마을 주민들의 씨앗을 선호하는 이유다.
DDS는 달리트 농민들의 농산물을 시세보다 10% 비싸게 수매해서 시장에 판다. 시내에는 유기농 농산물 매장과 유기농 전문식당도 만들었다. 시내에 있는 식당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 지역 달리트 농민들은 상위 계급보다 부유하다.
마을 안쪽 붉은 돔 모양 건물의 마치누르 마을 대안학교에는 10여 명의 남녀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인도 중부 방언인 뗄루구어 수업 중이다. 5학년 니로니카(12)가 별거 아니라는 듯 팔짱을 낀 채 칠판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합니다”, “거짓말하면 안 돼요” 1학년 니루바(6)가 대단하다는 듯 니로니카를 바라봤다. 평일 오전 9시 30분 1교시가 시작해 오후 4시15분 6교시 수업이 끝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10학년까지 공부한다. 조혼 풍습은 사라졌고 이곳의 젊은 여성들은 대안학교 덕분에 학력이 높다.
나르샤마(35)는 DDS가 세운 라디오방송국의 프로듀서 겸 작가 겸 엔지니어다. 그녀는 8살에 결혼할 뻔했다. 집에서 도망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DDS를 알게 됐다. 대안학교에서 10학년을 다 마치고 25살이 되던 해에 보험사 직원과 결혼했다. 지금은 7살 딸과 4살 아들을 둔 엄마다. 나르샤마의 아이들은 부유한 집안 아이들이나 다닐 수 있는 영어학교에 다닌다. 크리스트 교회가 운영하는 영어학교는 신분이 ‘달리트’라도 차별받지 않는 데다 교육 수준이 높아 부유한 달리트 부모들에게 인기가 많다. 라디오방송국 반경 20㎞ 내에 있는 40여개 마을 주민들이 나르샤마의 열혈 청취자들이다.
DDS는 인도에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달리트들이 소작농 운동으로 토지를 얻고, 마을 안에 살게 되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종자은행을 운영하고, 대안학교를 만들고 방송국을 세우는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은 짜릿했다. 인도에서 가장 힘이 약한 달리트 여성 농민들은 글로벌 종자기업·정부·상위 카스트·남성들이 만들어 낸 농업시스템이 자신의 삶을 구속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한때 ‘녹색 혁명’의 성공사례로 꼽히던 인도의 농촌은 세계 농업의 모든 문제점이 집약된 곳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유전자조작농산물GMO 종자가 농촌을 점령하고, 물은 부족하고,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이고, 빚에 허덕이던 농민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여기에 카스트 문제, 여성문제가 맞물리면서 인도 농업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이에 비하면 한국 농업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DDS는 인도에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비싼 값에 농산물을 수매하고 시장에 내다 파는가 하면, 농민교육, 종자은행 등 한국에서 돈 많은 농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나간다. 달리트들이 소작농 운동으로 토지를 얻고, 마을 안에 살게 되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종자은행을 운영하고, 대안학교를 만들고 방송국을 세우는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은 짜릿했다. 인도에서 가장 힘이 약한 달리트 여성 농민들은 글로벌 종자기업·정부·상위 카스트·남성들이 만들어 낸 농업시스템이 자신의 삶을 구속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의 눈빛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담겼다.
‘황폐한’ 인도에서도 DDS 농민들은 꽃을 피워냈다. 한국 농업은 DDS처럼 자신의 삶과 농촌 공동체의 모습을 스스로 결정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농업회의소 설립, 농협 개혁, 공동체 운동 등 변화의 조짐들은 조금씩 보인다. DDS는 30여 년이 걸렸다. 우리 농촌과 농업을 살리는 일에 30년을 투자하는 것은 해 볼 만한 일 아닌가.
(보성 농민 故 백남기 님의 명복을 빕니다.)
※필자 이재덕: 경향신문 기자. 대산농업전문언론장학생 출신으로 농업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 ‘인간의 얼굴을 한 성장’으로 우리를 안내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