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앞에서
충청남도 청양군에 장곡사라는 절이 있다. 낮은 능선 아랫자락 절 초입에는 100여 평 ‘장승공원’이 있는데, 이러저러한 소망을 안고 장승이 수십 개 서 있다. 10년 만에 들른 그곳에 새로 생긴 게 분명한 장승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인구증가대장군! 제 몸통을 파헤쳐 새긴 염원이 절절하다. 어느 역사학자는 해방 후 70년 동안 한국 농업·농촌이 겪은 변화를 단 두 줄로 요약한 바 있다. “한국 농업은 발전했다. 그리고 농촌은 해체되었다.” 농촌 사회의 지속가능성 위기를 온몸으로 알리는 장승을 보는 날이 온 것이다.
‘가족농’과 지속 가능성
농촌에 농가만 사는 건 아니다. 전국 평균으로 보면 농가 인구가 농촌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농가는 여전히 농촌 사회의 중핵이다. 인구 비율로도 주류를 구성하지만, ‘농촌’이라는 정체성은 바로 농가에서 비롯한다. 농가의 농업경영 형태를 ‘가족농업경영’이라 하고 줄여서 ‘가족농’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는 ‘가족농’을 농촌 사회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재조명하려 한다. 특히, 자가 영농 외에 수행하는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가족농에게 농업 문제가 중요하지만 한편으론 농촌 사회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다룰 때는 농업과 자가 영농 외 경제 활동을 병행하는 다면적 활동(pluriactivity)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가족농의 다면적 활동은 학계나 정책 당국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한 주제였다.
한때 농가의 겸업은 탈농의 징후라고들 여겼다. ‘가족농의 자립 경영’이라는 농정의 이상적 목표를 이루려면 규모화된 전업농을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20년 동안 전업농가와 겸업농가의 비율은 변화가 미미하다. 농가의 겸업화가 평균 농가소득 증가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1) 게다가 요즘은 역설적이게도 농사지으면서 시골 살림살이를 계속 유지하려고 가족 가운데 누군가는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농가도 적지 않다. 가령, 비교적 젊고 농업 경영 규모가 크지 않은 귀농 가구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질적 연구들에서는 ‘농업 소득만으로는 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진술이 자주 등장한다.2)
농사지으면서 시골 살림살이를 계속 유지하려고, 가족 가운데 누군가는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농가가 적지 않다. 가령, 비교적 젊고 농업 경영 규모가 크지 않은 귀농 가구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질적 연구들에서는 ‘농업 소득만으로는 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진술이 자주 등장한다.
왜 농사 아닌 다른 일을 찾나
가족농의 가계 유지 및 재생산 과정에서 다면적 활동은 중요한 살림살이 방편이다. 농업 생산 규모가 영세한 농가가 자가영농 외 경제활동을 통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농가의 다면적 활동을 두고 비효율적이며 결국엔 사라질 운명인 부정적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관점은 실제로 들어맞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농사 말고 다른 경제 활동을 하는 농가, 즉 다른 활동으로 소득을 얻는 농가의 비율이 80%를 넘는다. 그렇게 얻는 소득도 농업소득과 비슷한 수준이다.
2015년에 농가 평균 소득은 약 3,820만 원, 그중에 농업소득이 약 1,399만 원이고 자가 영농과 별도의 경제활동에서 얻은 소득이 약 1,152만 원이다. 한국 농가 경제를 설명할 때, ‘평균’은 상황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농업 소득 중위수는 약 406만 원, 자가 영농 외 경제활동 소득 중위수는 약 273만 원, 그 둘을 통해서 얻는 소득의 합계 중위수는 약 1,319만 원이다. 한 해 동안 자기 집 농사일이든 다른 일이든, 일해서 버는 돈이 1,319만 원도 안 되는 농가가 전체의 절반이라는 말이다. 농사지어 버는 돈이 406만 원도 안 되는 농가가 절반이라는 뜻이다.
가족농은 왜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 하는 걸까? 농사만 지어서는 모든 식구에게 필요한 소비 지출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상당수의 가족농에게 자가 영농 외 경제활동은 생존에 필수적인 생존 수단이다. 그것 없이는 가족농이 유지될 수 없다.
가족농은 왜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 하는 걸까?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다. 답은 간단하다. 농사만 지어서는 모든 식구에게 필요한 소비 지출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상당수의 가족농에게 자가 영농 외 경제활동은 필수적인 생존 수단이다. 그것 없이는 가족농이 유지될 수 없다. 자기 농사일 말고도 다른 일자리가 없다면 농사도 지을 수 없다. 가족농이 계속 농사짓고 살아야 농촌이 유지될 테지만, 앞뒤를 뒤집어도 맞는 말이 된다. 농촌 인구가 유지되어 다양한 일자리가 있어야 가족농이 유지되고 농업도 유지된다.
국가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의 가족농에게 자가 영농 외 경제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은 농업소득을 보완한다는 정도의 부수적 의미를 갖는 게 아니다. 농가의 살림살이에 필수적인 활동이다. ‘농사만 지어서는 살림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1990년대 농산물 시장이 개방된 이후 이 같은 상황은 계속되었다. 전업화와 규모화를 시장 개방 상황에 대한 대응책으로 내걸고 농정을 추진했지만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규모를 키워 농업소득을 높이는 것으로 농가를 유지한다는, 또는 농업 경쟁력을 높인다는 단순한 시나리오의 적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 1>과 <그림 2>에서 보는 것처럼 10여 년 사이에 농업소득과 자가영농 외 경제활동 소득이 균형을 이루는 중간 계층에 속한 농가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그림 3>에서 농업소득과 자가 영농 외 경제활동 소득의 중위수 좌표값이 원점에 가까워진 것은 다수의 농가가 빈곤화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중위수와 평균값의 좌표 이동 패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농가들 사이에서 소득 격차가 심해졌음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한국의 농가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규모가 큰 전업농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농업소득과 자가영농 외 경제활동 소득이 균형을 이루면서 증가하지 못하고, 두 종류의 소득 모두 감소하는 농가의 수가 많아졌다. 즉, 빈곤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3)
지역사회 속에서 경제활동 기회를
농업 경영규모를 확대해 농업소득을 크게 올릴 수 있다면 농업 정책만으로도 가족농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소수의 농가에게만 해당되는 전략이다. 한국 현실에서는 농업소득으로 채우지 못하는 가계 소득의 상당 부분을 자기 농사가 아닌 다른 일자리에서 채워야 한다. 그래야 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이라는 가계 내부 요구가 농사 외에도 여러 경제활동을 수행하게 하는 기본 동기이지만, 농촌 지역의 노동시장 여건이 그러한 경제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약한다. 농촌의 일자리는 인구 규모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농촌 인구 감소와 더불어 전체적으로는 일자리가 줄고 있다. 이는 농촌 지역사회 주민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동시에, 가족농 유지 재생산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농촌의 일자리는 인구 규모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농촌 인구 감소와 더불어 전체적으로는 일자리가 줄고 있다. 이는 농촌 지역사회 주민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동시에, 가족농 유지 재생산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일자리를 어떻게 창출할 수 있을까? 농촌 주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비스 요구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일자리를 어떻게 창출할 수 있을까? 해법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농촌 주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비스 요구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런 요구에 대응하려는 내생적인 지역사회 활동 속에서 가족농의 농외 경제활동 기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가령, 이웃 농가 구성원들이 협동조합을 조직해 농촌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어떠한가? 또는 농가 구성원들이 모여 지역 내 학교에서 실시하는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위탁받아 어린이와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지역사회 교육에 참여하는 일은 어떠한가? 그런 일들을 수행함으로써 지역사회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농가는 일정한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사실은 그 같은 실험들이 몇몇 농촌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농촌에서 주민의 생활 서비스를 유지하는 일은 지역의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과제다. 그런 서비스를 지역사회 내부에서 확보하는 일은 필경 농가의 다면적 활동을 촉진하는 일이 될 테다. 농가 구성원이 주축이 되어 주민에게 필요한 지역사회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농촌 발전 모델과 그것을 촉진할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1) 김미복·박성재(2014), “농업구조 변화와 농가경제, 정책적 시사점”, 『농정포커스』 제95호, 9쪽, 한국농촌경제연구원
2) 김정섭(2014), “귀농인의 사회·경제 활동과 함의”, 『농촌지도와 개발』 21(3), 63쪽, 한국농촌지도학회
3) Ploeg, J. D. van der and Ye, J.(2016). “The circularity of town-countryside relations and multiple job holding”, In J. D. van der Ploeg and J. Ye (eds.), China’s Peasant Agricultue and Rural Society: Changing paradigms of farming. UK: Routledge. 40쪽의 내용을 참고.
※필자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농촌연구부 연구위원. 가족농, 협동조합, 마을만들기, 귀농, 농업 노동력 등 다양한 관심사에 파묻혀 바쁘게 살고 있다. 언젠가 시골 초당 하나 얻어 적게 먹고, 삼천 권의 책을 읽고, 산책하고, 찾아오는 벗들과 차를 나눌 한가한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