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세레스 파크와 콜링우드 체험농장
“임대료요? 1년에 1달러입니다.
100년이면 100달러죠.” 호주 멜버른의 도시형 유기농장 ‘세레스 파크CERES Community Environment Park’ 교육담당자 셰인Shane이 일행 중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1달러라니? 면적 1만 3,500평(4.5ha)에 이르는 거대한 부지(시유지)를 사용하는 임대료가 고작 연간 1달러라니…. 이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바로 이것이구나!”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농업이 호주의 중심산업인 원동력이 이 ‘1달러’에 숨어 있을 것 같은 직감이었다.
버려진 땅을 활용하기 위한 시민들의 제안과 논의, 잇따른 사회적 합의, 그리고 그 합의를 실행하기 위한 각 주체들의 협력과 배려, 책임…. 본적도 없는 장면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펼쳐졌다. 이 과정이 ‘1달러’에 담겨있으리란 제멋대로의 추리와 함께.
‘1달러’에 담긴 배려와 책임감
세레스 파크는 멜버른에서 동쪽으로 차로 약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생태학습장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에서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육농장이다. 1981년 시민들이 제안하고 1982년부터 운영했다니 그 역사가 벌써 33년이다. 시민들이 이곳을 교육농장으로 만들자고 나설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이 부지는 원래 공장지대였고, 쓰레기집하장으로도 이용됐다. 그러다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땅은 방치 상태에서 오염됐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실직자로 전락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버려진 땅의 친환경적 복원과 교육적 활용, 그리고 지역민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 뜻있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지방정부와 의회도 여기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이 땅을 10년간 시민사회에 임대했다. 이후 세레스 파크로 거듭난 이 땅은 지금 지역사회의 환경교육과 유기농 교육, 지역축제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세레스 파크는 외형부터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지붕이 이어진 낮은 건물 위로 남반구의 파란 하늘이 넓게 펼쳐졌다. 건물은 목재와 함석으로 만들어져 단순하면서도 날렵하고 견고해 보였다. 우리나라 시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큰 입간판이나 조명, 광고판 등은 찾아볼 수 없었고, 합판 또는 종이에 글을 쓰거나 칠판형 메뉴판과 안내판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건물의 내외부가 복잡하지 않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버려진 땅의 환경친화적 복원
몇몇 그룹이 이미 이곳 교육동에서 세미나와 체험을 하고 있었다. 이곳의 코스는 전문과정인 퍼머컬쳐 디자인 코스, 도시농부 과정, 환경교육 과정, 지속가능 농업 과정 등과 요리, 치즈, 공예, 가드닝(농업) 등의 체험코스로 구성돼 있다.
교육동 뒤편에 지역 유기농산물 생산자를 위한 상설 유기농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진열된 물품마다 품목과 가격, 원산지 표시가 철저했다. 누가 생산했는지, 농장이 매장에서 몇 ㎞ 떨어져 있는지도 상세하게 기재돼 있어 놀랐다. 진열된 물품은 과일과 채소 등 다양했고, 가공품은 실내매장에서 따로 판매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작물을 재배하는 유기농장은 우리나라 도시 근교의 주말농장과 유사했다. 주변은 폐목재로 울타리를 둘러놓았고, 비닐하우스도 몇 동 있었다. 농장 곳곳에 나무박스로 만든 퇴비통이 설치돼 있고, 식물을 세우는 지주대와 물을 공급하는 호스도 깔려 있었다.
유기농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기는것이 파리였다. 떼로 몰려다니지는 않았지만, 시시때때로 주위를 날아다니며 사람을 귀찮게 했다. 이것마저 유기농업의 산물로 이해하긴 했지만 도시생활에 익숙한 방문객에게는 익숙지 않았다. 농장은 유기농업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장이자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종자 채종도 직접하고, 이 종자로 모종을 키워서 심고 판매도 하므로 제법 큰 규모의 육묘장이 농장 안에 있었다.
생태순환농법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매장에서 판매하고 버려지는 식품과 식재료, 농장에서 자라는 잡초 등의 식물, 방사하는 닭의 배설물 등이 자체 퇴비화 과정을 거쳐 퇴비로 만들어져 흙으로되돌려주는 방법이다.
교육장이 곧 생태순환농업 현장
유기농장 외에 세레스 파크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애버리진Aborigine 체험 코스였다. 호주원주민 애버리진의 문화를 교육하는 교육장과 아프리카 마을, 인도네시아 마을이 섬세하게 재현돼있었다. 이 속에서 원주민의 문화를 체험하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제3세계 개발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이 코스의 목적이다. 원주민의 문화와 지속 가능한 삶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세레스 파크에서는 매년 축제를 열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 세레스 파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폐기물 재활용과 신재생에너지 교육이다. 친환경(물순환, 수질, 토양) 교육장과 에너지(태양열, 풍력) 교육장이 갖춰져 있다. 모든 건물에는 빗물을 수집하는 장치가 있어 빗물을 재활용한다. 분리수거와 신재생에너지, 전기자동차, 폐부품을 활용한 자전거 조립 등 환경친화적인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세레스 파크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풍력과 태양력으로 얻는데, 초기에는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하다가 건물이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50%정도라고 한다. 20달러를 내고 중고 부품으로 자신만의 자전거를 조립해 가는 DIY OFFICE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34년 전 시민들이 구상했던 대로 세레스 파크는 훌륭한 환경교육장으로 변모했다. 강사 30명에 상시 고용인원이 180명에 이른다고 하니 지역민 고용창출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한꺼번에 700명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많을 때는 하루 3천 명이 이곳을 다녀간다고 한다. 2010년에 이미 100만 번째 학생이 생태교육을 받았다. 버려진 땅을 교육농장으로 만드는 멜버른 시민의 실험은 지역민의 참여와 지방정부의 지원 아래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두물머리 모델이 된 세레스 파크
세레스 파크에 대해 알아 가면 갈수록 내가 사는 양평의 두물머리가 떠오른다. 두물머리는 정부의 4대강 사업 전까지 수도권 최대의 유기농산물 생산지였다. 2009년 4대강 사업이 강행되면서 두물머리에서 유기농을 하던 농민들과 시민들, 천주교 등이 ‘4대강 반대, 유기농지 보전’을 내걸고 정부를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긴 싸움 끝에 2012년 8월 14일 천주교 수원대교구의 중재로 정부와 농민들은두물머리 유기농지를 생태학습장으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서 생태학습장의 모델이 되는 곳이 바로 세레스 파크다. 당시 ‘양평시민의소리’ 보도(2012년 8월 15일)를 보면 “생태학습장 조성에 필요한 비용은 정부가 지원하고, 구체적인 추진은 경기도와양평군, 천주교, 농민 측이 추천한 인사들로 구성하는 협의 기구를 만들어 논의키로 했다. 또한 두물머리에 조성될 생태학습장은 유기농 체험과 교육, 대안에너지, 문화체험 교육장 등으로 주목받고 있는 호주의 세레스 생태공원과 영국의 리턴 생태공원을 모델로 삼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합의 후 바로 ‘두물머리 생태학습장 추진협의회’가 만들어져 기본설계에 착수했다. 1년여의 논의 끝에 드디어 2013년 9월 29일 두물머리 생태공원의 기본 설계를 완성하고 일반에 공개했다. 이 안에 따르면 두물머리 생태공원은 4대강 사업비 34억 원을 투입해 28만㎡ 부지에 5개 구역으로 나눠2013년 연말까지 조성키로 했다.
제1구역 에너지 생태체험공원, 제2구역 생태체험구역, 제3구역 시설집중화구역, 제4구역 생태회복구역, 제5구역 문화역사체험구역으로 해 체험교육장, 생태에너지 테마공원, 자연습지, 한강자생식물관찰지, 유실수 체험공간 등을 배치키로 했다.
순항하던 생태공원은 2013년까지 기초 구획정리를 위한 토목공사를 끝낸 후 2014년 들어 양평군이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고착상태에 빠져 있다. 공간만 조성해 놓은 채 프로그램과 운영주체 마련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국토교통부에서조차 주민 주도로 생태학습장 운영하면 지원금을 주겠다고 밝혔지만 양평군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 5월에는 한강유역환경청이 생태공원과 별도로 두물머리에 조각공원과 둘레길을 조성하는 ‘에코폴리스 양수리 조성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나 시민과 농민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호주의 세레스 파크는 시민들의 제안에 지방정부와 의회가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세계적인 생태공원으로 거듭났다. 두물머리 또한 대도시 근교에 위치하고 시민들과 농민들이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레스 파크와 비슷한 길을 가려 하지만, 지자체는 이러한 생태공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개발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소중한 자원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양평군이 ‘세레스’라는 좋은 모델을 거울삼아 주민 주도의 생태 학습장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소농들을 위한 장마당, 파머스마켓
세레스 파크 외에 이번 연수에서 의미 있게 본 곳은 콜링우드 체험농장CollingwoodChildren’s Farm과 파머스마켓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여행이라면 콜링우드를 강력히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콜링우드는1979년 설립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형 어린이 체험농장이다. 멜버른 시내에서5km 떨어진 아보츠포드의 야라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자연스럽게 농업과 농촌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하는 비영리농장이다. 매월 첫째 일요일은 가족의 날로 바비큐, 말타기 등의 행사를 하고둘째 토요일은 슬로푸드 멜버른과 함께 파머스마켓을 운영한다. 이날의 입장료는 2달러이고 다른 날은 20달러다.
콜링우드를 방문한 날은 파머스마켓이함께 열리는 날이었다. 이른 오전 시간인데도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인상적인 것은 장을 보는데 그 흔한 비닐봉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머스마켓의 판매자인 농부들도 물건 담아주는 비닐봉지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고, 구매자들 또한 비닐봉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모두 장바구니나 에코백을 이용했다.
파머스마켓 판매자 참가비는 90달러라고 했다. 한 번 장이 서면 2천~3천 명이 다녀가기 때문에 소농이나 유기농 생산자들은 파머스마켓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파머스마켓은 현금결제를 하고, 소비자들을 직접 만나 가공품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수 있고, 가공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했다. 판매자들은 서로 재료를 구매하기도 하고 도움을 주면서 이웃사촌처럼 지낸다. 멜버른이 속한 빅토리아주에만 40개의 파머스마켓이 서고 600여 명의 농민이 판매자로 활동한다고 하니 소농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판매처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추억이 쌓여 오늘을 만든 체험농장
콜링우드 체험농장은 도시 근교의 금싸라기 땅을 지방정부가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이 동물과 농업,자연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다. 이곳에서 염소, 말, 당나귀, 돼지, 오리, 닭을 만져보고 먹이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우유를 짜 볼 수 있는 젖소 체험도 한다.
이곳 매표소는 시골의 버스터미널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여기서도 세레스 파크처럼 건물을 나무와 함석으로 지었다. 농장 입구에 있는 커피숍은 자리가 부족해도 확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 자체가 수익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헛간에서 나온 오리와 닭이 아이들 틈에 끼어 돌아다녔다. 먹이를 주면서 만져볼 수도 있다. 동물이 사는 공간은 어릴 적 보았던 시골 마을 헛간 같았다. 나무로 골조를 만들고, 얼기설기 얹은 지붕, 건초더미가 쌓여 있고 그 위에 닭이나 고양이, 염소가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무로 된 울타리와 테이블, 의자 곳곳에는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뭐든 새것을 들이지 않고 고쳐서 쓰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연수단을 안내한 김태훈 교수는 “이곳은 10년 전에도 이대로였고, 10년 후에도 이대로 일 것이다. 아이들과 엄마·아빠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세레스 파크와 콜링우드 체험농장은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농업을 접하게 하고 농업에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농업사회인 호주의 기초를 세우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시민들과 지방정부는 협력과 배려의 정신을 발휘했고, 시민들은 자원봉사를 하고 가족과 함께 이용하며 공간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호주의 농업과 호주 사회가 지속 가능성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레스 파크와 콜링우드 체험농장은 멜버른 시민들에게는 농업과 생태를 교육하는 공간이지만 방문객인 우리에게는 사회적인 협력과 배려의 훌륭한 교육장이었다.
※필자 이대호: 양평시민의소리 전 편집국장. 소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15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양평에 살며 퍼머컬쳐 농장을 가꿀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