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사진작가, 산을 품은 농부가 되다

강병규 지리산구절초영농조합법인 대표

지리산에서 13년째 경관농업을 짓고 있는 강병규 씨와 부인 김선이 씨, 딸 다현 양.
지리산에서 13년째 경관농업을 짓고 있는 강병규 씨와 부인 김선이 씨, 딸 다현 양.

기다려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두운 산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 산의 등줄기에서 피어오르는 운무, 새하얀 눈꽃이 만발한 설산까지. 자연이 지리산의 품에 잠시 머물다 가는, 눈부신 순간이다.
 ‘지리산 사진작가’ 강병규 씨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10년 넘도록 주말마다 산행을 했다. 2006년 어느 겨울날, 그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리산에 계속 머무르기로 마음먹은 건, 이곳에서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강병규 씨는 “아름답게 유지한 경관이 우리의 자산이 된다”고 말했다.
강병규 씨는 “아름답게 유지한 경관이 우리의 자산이 된다”고 말했다.

지리산에서 ‘함께’ 짓는 농사
강병규 씨가 전북 남원 산내마을에 터를 잡은 지 어느덧 13년. 그는 여전히 지리산 사진을 찍고, 지리산에 관한 글을 쓴다.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사진작가가 아닌, ‘농부’라고 말한다.
 “저는 농사짓는 사람이에요. 지리산에서 꽃을 키우고, 경관을 가꾸고 있어요. 지리산의 문화, 지리산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가치를 농사짓고 있는 거죠.”

지역민과 구절초밭을 함께 가꾸며 상생한다. ⓒ강병규
지역민과 구절초밭을 함께 가꾸며 상생한다. ⓒ강병규

 강병규 씨는 지리산자락 1만6000평 땅에 토종야생화 구절초를 키운다. 구절초를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유지하기 위해 농약은 물론 퇴비도 주지 않는다. 무성한 잡초는 손으로 일일이 뽑는다. 아름다운 경관 뒤에는 보이지 않는 농민의 손길이 있다.
 “저 혼자서는 절대 못 하죠. 이 경관을 유지하려면 평생 농사지으신 어르신들의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어르신들이 꽃을 예쁘게 가꿔주시면, 저는 어떻게든 벌어서 어르신들에게 돌려드리죠. 우리는 각자 잘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같이’ 먹고사는 거예요. 선순환인 거죠.”

흐드러지게 핀 구절초꽃밭을 찾은 사람들. ⓒ강병규
흐드러지게 핀 구절초꽃밭을 찾은 사람들. ⓒ강병규

지리산에 사람이 모인다
푸른 소나무 아래 구절초꽃이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가을이 되면, 산내마을에는 축제가 열린다. 강병규 씨가 “누구든 하루쯤 지리산의 감성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는 마음에 시작한 행사가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을 축제가 되었다. 이제 그는 축제에서 마을의 미래를 본다.

지리산 구절초 축제는 마을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강병규
지리산 구절초 축제는 마을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강병규

 “아무리 힘들어도 매년 축제를 열어요. 구절초 축제가 우리 마을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브랜드로 자리잡을 거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축제에서 쓰는 돈은 전부 지역에서 다시 쓰입니다. 이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고, 이 지역 철물점에서 자재를 사고, 지역민에게는 일당을 주죠. 우리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지리산 길섶’ 갤러리에 다녀간 이들이 남긴 수많은 쪽지들.
지리산 길섶’ 갤러리에 다녀간 이들이 남긴 수많은 쪽지들.

 문화공간 ‘지리산 길섶’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지리산 둘레길이 생기면서, 다양한 지리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 갤러리에는 수많은 방문객의 흔적이 가득하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메모지에 글귀를 적었어요. 주로 소원이 많은데 제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을 적어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같은. 저는 이미 결혼했는데.(웃음)

강병규 씨는 여전히 카메라에 지리산을 담고 있다.
강병규 씨는 여전히 카메라에 지리산을 담고 있다.
 

마을이 좋다, 사람이 좋다
강병규 씨는 자신과 같은 중년층의 귀촌을 농촌의 새로운 열쇠라고 본다. 지역에서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하지만, 청년이 시골에서 살 수 있는 동력이 없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농사로만 먹고살기에는 너무 어려워요. 중년층이 약간의 자본과 사회적 경험으로 시골에서 다양한 것을 창출할 때, 청년들에게는 기회가 되고 에너지가 생기는 거죠.”

‘지리산 길섶’에 구절초꽃이 활짝 폈다. ⓒ강병규
‘지리산 길섶’에 구절초꽃이 활짝 폈다. ⓒ강병규

 강병규 씨의 생각 끝에는 언제나 마을이, 그 마을 안에 사람이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지리산구절초영농조합법인이 마을까지 끌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법인이 마을로 내려가 매장을 운영할 수도 있고, 폐가를 리모델링해서 마을의 경관을 새로이 꾸밀 수도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 지역에서 평생을 사신 어르신들이 외부시설이 아닌 마을에서 돌봄 받다가 눈감으실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이원규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일부)

 강병규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지리산을 똑 닮았다. 이원규 시인의 시구절처럼, 그는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으로 기다린다. 지리산을 아름답게 가꾸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글·사진 이진선

‘지리산 능선의 아침’ 강병규 作
‘지리산 능선의 아침’ 강병규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