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원 한살림제주 전무이사
제주공항에서 차로 20여 분, 제주시 노형동 아파트 군락 사이 파란 쉼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건물에는 ‘제주담을’이라고 쓰여있었다.
“여기는 새로운 농업 실험의 장이에요.”
이곳을 기획하고 만드는 데 중심이 된 강순원 씨(한살림제주 전무이사)가 말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건물 뒤편으로 들어서니, ‘실험’이 한눈에 보였다. 한쪽에 마련된 20여 개 텃밭은 주민들이 직접 가꾸는 주말농장이다. ‘새싹이네’, ‘작은 거인’, ‘거대한 코딱지 농장’과 같은 재치 있고 익살스러운 이름표가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개를 돌리면 영화 <호빗>에 나오는 통나무집을 닮은 ‘호빗만화방’이 있는데,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림책과 재미있는 만화책을 읽을 수 있는 아이들의 ‘아지트’다.
꿈꾸는 사람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강순원 씨는 2017년 호주·뉴질랜드 대산농촌재단 해외농업연수를 다녀온 뒤, 2019년 한살림 물품과 제주 로컬푸드를 판매하는 복합형 매장을 기획하게 됐다. 기존의 한살림 매장을 넘어서는 확장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연수 때 마음이 잘 맞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호주·뉴질랜드에 갈 때만 해도 농업 정책, 농업 구조, 농민 조직을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세레스CERES, 콜링우드Collingwood 같은 도시형 농장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제주에 도시형 농업 모델을 가져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고, 홍천기 씨((사)도농문화콘텐츠연구회 대표)와 박호진 씨(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사무국장)에게 러브콜을 보냈어요.”
강순원 씨가 전체적인 기획과 운영을 총괄하고, 홍천기 씨가 브랜드 디자인과 농부시장 운영을, 박호진 씨는 교육농장을 조성하고 그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호주 멜버른시 외곽에 있는 도시형 교육농장 세레스, 커뮤니티 가든 베지아웃Veg Out, 뉴질랜드 호비튼Hobbiton 등을 담았다. 강순원 씨는 “우리가 함께했던 경험이 아니었으면 이런 컬래버레이션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렇게 ‘제주담을’이 탄생했다. 이곳은 한살림 직매장, 로컬푸드 매장뿐 아니라 농부시장, 교육농장, 공유부엌, 물류센터 등 지역사회 연대를 위한 다양한 역할을 한다.
“농민과 도시민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나라에 전혀 없는 게 아니거든요. 단기간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을 뿐이죠. 제주담을이 오랫동안 지속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홍천기 씨가 ‘담을장’을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성장하는 ‘담을장’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제주담을’ 뒤뜰은 또 다른 실험 장소가 된다. 제주 식문화 농부시장 ‘담을장’에서 농민은 직접 기른 농산물을 판매한다. 자신이 만든 가공품, 수공예품, 공정무역 제품을 파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장터는 기존 유통시스템에 들어가지 못하는 소농, 가족농의 성장을 돕는 장치가 된다.
“농민들이 장터에서 버는 10만 원, 20만 원이 적은 돈 같아도 농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해요. 또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면서 자존감을 키우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거죠. 담을장에서 발굴한 농민을 로컬푸드 매장에 진입시키고, 더 발전시켜서 한살림 제주에 들어가게 하는 것. 그게 꿈이에요, 꿈.”
홍천기 씨는 ‘얼굴있는 농부시장’(얼장) 기획자의 경험을 토대로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제주담을’의 가치에 맞는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고 있다.
“담을장은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장터예요. 쓰레기를 최소화하니까 당연히 일회용품 사용을 하지 못해요. 소비자들에게 미리 충분히 알려서 장바구니, 그릇을 지참하도록 합니다. 지난 5월 첫 행사가 끝나고 나서 제가 뒷짐 지고 꾸부정하게 다니면서 쓰레기를 주웠는데, 딱 한 줌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생태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실천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함께 행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
강순원 씨가 뒷마당에 띄엄띄엄 심긴 감귤나무를 보고 “코로나19 이후 식물들도 거리를 두고 키우고 있다”는 농담을 건넸다. 그는 건너편에 보이는 감귤농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감귤원 보이죠? 감귤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있잖아요. 농약도 여러 번 쳤어요. 일하는 사람은 딱 2명이고요. 생산을 위한 공간이니까 나름의 목적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 거죠. 반면에 여기는 텃밭만 해도 20가족이 와서 관리해요. 매달 50명 넘는 사람들이 장터를 열고요. 장을 보는 사람부터 돗자리 깔고 책을 읽는 사람까지, 오가는 사람이 아주 많지요. 이곳은 농업의 다양한 기능들을 위한 공간이니까, 생산 중심의 농업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소비자가 느끼게 되는 겁니다.”
홍천기 씨는 “농업과 관련된 새로운 시도를 관이 아닌 민간 주도로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강순원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시장경제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 가지 대안 실험을 해보는 거예요. 민간이 주도하는 로컬푸드, 협동경제의 플랫폼을 만들어야겠는 생각이, 좋은 동지들 덕분에 구체적으로 정리가 되면서 제주담을이 탄생하게 되었어요.”
‘제주담을’ 텃밭에 펌프가 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 땅속의 물을 끌어 올리는 펌프는 요즈음 좀처럼 볼 수 없어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아이들에게는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잇감이 된다고 했다. 펌프가 마중물이 없으면 물을 끌어 올릴 수 없듯이, ‘제주담을’이 마중물이 되어 다채로운 농農을 이끄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