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화 지내들영농조합법인 기획팀장
전남 영광군 군남면 죽신마을, 푸른 하늘과 맞닿은 너른 들녘에 노랗게 속을 채운 벼들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이선화 씨는 동료이자, 가족이며, 이웃인 ‘지내들’ 식구들과 사진을 찍으러 황금빛 들판으로 향했다. 그가 곱게 차려입은 정순 할머니의 매무새를 칭찬하고, 카메라 앞에서 표정이 굳어진 옥이 할머니의 팔짱을 꼭 끼며 환히 웃는 모습을 보니, 어떤 시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이성부 시 ‘벼’ 일부)
여섯 아낙네와 세 마당쇠
지내들영농조합법인은 마을기업이다. 이선화 씨는 “우리가 지내들池內- 들녘에서 나오는 농산물 판매를 책임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보리밥보다 쌀밥을 선호하면서, 2012년에 정부가 보리 수매를 중단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죽신마을 보리를 거둬서 파는 역할을 했어요. 이집 저집 곳간에 있는 보리를 끌어모아 28t 대형트럭에 실어서 팔았죠. 우리는 그걸 ‘한 차 낸다’라고 불렀어요.”
당시 이선화 씨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 여성들은 “우리가 그냥 있으면 안 된다”며 손을 맞잡았다. 이듬해 영농조합법인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보리쌀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됫박 장사부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특별한 포장 없이 투명한 비닐봉지에 넣어서 팔았죠. 어머니들은 각종 박람회며 품평회까지 다니며 영광 보리쌀을 알렸어요. 그 덕분에 마을기업 지내들이 자리 잡게 되었고요.”
여섯 아낙네와 세 마당쇠, 합쳐서 9명이던 출자자는 어느새 21명이 되었다. 그사이 농산물 납품 농가는 5가구에서 90가구로 크게 늘어났다. 지내들영농조합법인은 이제 면을 넘어 군을 대표하는 마을기업이다. 지난 9월,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2020년 전국 우수마을기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 마을기업으로 뽑히는 경사도 있었다.
청년이 돌아왔다
죽신마을의 폭발적인 성장을 도운 건 ‘돌아온 청년’ 이선화 씨였다.
“회사 다닐 때도 주말이면 집에 내려와서 서류 작업을 했어요. 일손이 부족할 때는 도정도 하고, 포장도 하고요. 부모님 힘드니까 돕는 거지, 월급 받고 일할 수준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온라인 쇼핑몰에 올려놓은 보리쌀의 주문량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거예요.”
2015년 8월,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예 내려왔다. 다음 해인 2016년 1월에는 새롭게 단장한 지내들영농조합법인의 홈페이지를 선보이고, 4월에는 마을 체험장을 활용한 번듯한 오프라인 매장의 문을 열었다.
“홈페이지에서 바로 주문할 수 있도록 ‘결제창’을 열었어요. 그때부터 온라인 매출이 확 늘기 시작한 거죠. 기존에는 우리를 아는 분들만 전화로 주문했는데,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확보하게 된 거예요.”
이선화 씨는 고객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찰보리 20kg을 구매한 분들께 추가로 오색五色보리 1kg을 더 보냈어요. 어느 분이 전화해서 ‘이건 뭐예요? 썩은 게 왔어요’라고 하셔서, ‘청색보리 색깔이 원래 그래요. 오색보리입니다’라고 설명한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오색보리를 찾는 분들이 엄청 많아졌어요. 하하.”
그는 농촌에서 일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이야기했다.
“어른들이 못하는 부분을 우리가 하는 거잖아요. 그저 컴퓨터 하나 할 줄 아는 건데, 도시에서는 열 배로 애를 써도 누가 알아주지 않던 게, 여기서는 조금만 노력해도 크게 알려지니까 더 재밌는 것 같아요.”
함께 행복하도록
이선화 씨의 동료들은 그가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마실 다니며 인사드리던 동네 아주머니들이다. 그는 “한 해 한 해 갈수록, 할머니들의 건강이 쇠약해지는 게 보여서 너무 막막하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이 엄청 큰 힘이 되거든요. 고추 다듬는 것도 저 혼자 하면 너무 힘든데, 할머니들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심심한데 잘 됐다’면서 도와주세요. 수고비는 어르신들 통장에 입금하는데 잘 모르시더라고요. 아주 가끔씩 ‘뭘 이렇게 많이 넣었어!’라고 하시면, 저는 ‘엄마가 넣었나봐~’ 이야기하고 슬쩍 넘어가죠.”
이선화 씨는 마을기업에서 일하면 할수록 ‘함께하는 가치’를 알아간다고 했다.
“우리는 옛날부터 품앗이했어요. 아버지가 예초기로 이웃집 몫까지 풀을 베면, 할머니들이 고맙다고 옥수수를 따서 줘요. 내 논에 우렁이 넣으러 갔다가 옆집 논에 같이 넣어주는 것도 흔한 일상이고요.”
그는 ‘공동영농’의 중요성을 콕 집어서 이야기했다.
“농가들이 대출 때문에 힘들어하잖아요. 집마다 농기구 하나씩 있는 게 농가에 큰 부담이고요.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공동농업이에요. 농작업비를 아낄 수 있고, 농기계 없는 분들도 함께할 수 있잖아요. 어느 한쪽만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고, 그게 공동체를 지속하게 해요.”
마을에 사람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이선화 씨에 이어 언니, 남동생까지 삼 남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동생의 친구가 농사를 짓겠다고 지역에 정착했다.
“집으로 다시 올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공부를 왜 했지? 돈 벌려고. 돈을 왜 벌었지?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럼 가족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게 행복의 끝이 아닐까. 요즘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가족이랑 함께 있으니까 웃을 일이 정말 많아요. 부모님과 이웃들이 제게 베풀어 준 것처럼, 이곳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삶의 터전이 되도록 만들고 싶어요.”
이선화 씨는 어르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공동체를 돌아온 청년들과 함께 이어나갈 것이라며 웃었다. 벼가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살듯, 아이 어른 함께 살며 조화를 이루는 마을이 벌써 눈에 선하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