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와 협력이 필요한 공공의료

2015년 5월 홍성 우리동네의원 개원식 풍경. ⓒ민택기사진관
2015년 5월 홍성 우리동네의원 개원식 풍경. ⓒ민택기사진관

연대와 협력이 만들어낸 의료생협
“한 마을이 잘 되려면 교사와 농민과 의사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동네에 서당 훈장님과 두레를 하는 농민들, 한의원이 있어서 마을 모습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는 유기농업 특구로 지정될 만큼 든든한 농민이 있습니다. 갓골어린이집부터 여러 학교 선생님들도 있습니다. 이제 상주하는 마을 주치의와 뜸방과 물리치료진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창립총회는 오랜만에 제대로 갖추어진 마을로 태어나는 경사스러운 날입니다.”(2015년 홍성우리마을의료생협 창립총회 인사말, 홍순명, 풀무학교 전 교장)

충남 홍성군의 홍동면과 인근 지역은 공동체, 유기농업, 협동조합, 대안교육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위대한 평민’을 강조한 풀무학교의 철학과 모두가 도시로 떠날 때 농촌을 지키면서 마을과 교육, 농업을 고민한 사람들이 있다.
  동네의원 의사인 나는 광주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의대를 졸업했다. 동네의사를 꿈꿨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와 정보 공유에 관심이 있어 서울에서 가정의학과를 수련한 후 운명처럼 기독청년의료인회를 만나 협동조합 방식의 의료를 알게 되었다. 의료협동조합에서는 ‘착한 의사’ 혼자서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 의료인과 주민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공의를 마치고 대체복무로 보건소에서 일하면서 우연히 홍동에 왔다. ‘위대한 평민’을 강조한 마을과 농민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은 모두 새로웠다. 오랜 역사에도 지역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실험해볼 수 있도록 응원해주었다. 보건지소장으로 「지역과 학교」라는 동네 계간지에 글을 싣고, 마을 단체들의 발표 자리에 홍동의 일차의료에 대해서 발표했다.
  공중보건의가 끝나고 안성의료조합에서 일을 했다. 홍동과 안성을 오가는 어중간한 생활을 하며 지역 활동을 더 고민하게 되었다. 2011년 겨울 강연회를 시작으로 만 4년 동안, 10번의 열린모임과 34번의 크고 작은 건강모임, 71번의 준비모임을 갖고 2015년 5월 홍성우리마을의료생협을 창립했다.
  오랜 기간이었다. 동네에서 주민들과 함께 의료생협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면 ‘몇 년 그냥 하다 보면 길이 보인다’는 답변을 종종 들었다. 답답한 소리 같았다. 조합이 창립하고 다른 지역 분들이 의료생협을 설립하고 싶다며 방문한 적이 있다. 의사 수급은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수완 좋아 보이는 사람과 순진하지만 계산은 빨라 보이는 지역 명망가가 보였다. 걱정이 되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조합은 의료 사기로 뉴스에 올랐다. 사무장병원이라 하여 의료를 사업이나 사기 수단으로 사용하는 업자들이 있다. 신뢰가 필요한 일에 준비와 기다림은 건너뛸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홍성우리마을의료생협 정기총회. ⓒstudio H
홍성우리마을의료생협 정기총회. ⓒstudio H

지역민이 주체가 되는 건강공동체
조합 설립과 개원 이전에도 건강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건강강좌를 열었다. 함께 운동을 하고 건강식을 먹고, 마음을 나누면서, 조합이 꿈꾸던 모습인 스스로 서로를 돌보는 건강공동체를 경험해보았다. 조합 설립 이후에는 동네의원 운영과 함께 1)농촌 고령화에 대한 준비 2)건강교실과 건강소모임 활동 3)지역화합과 다양한 문화활동을 진행했다. 농촌의 고령화에 대한 준비는 스마트폰 교육이나 요리교실 같은 소규모 활동에서 시작해서 주 1회 노인건강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활동은 지역 자원을 활용해 진행하며 지역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 지역 꽃차농장에서 차를 만들고, 빵 만들기 체험장에서 피자를 만든다. 지역농장에서 각자가 준비한 간식으로 팜파티를 연다. 회의를 통해 각자의 바람을 모아 기차를 타고 국립생태원으로 야유회를 간 적도 있다. 생활의 필요를 협동으로 해결하는 생협의 원칙은 여기서도 효과적이다. 필요를 모아 한글교실을 만들기도 했다. 건강교실은 진료실이 활성화되면서 지역의 태극권이나 뜸, 비폭력대화처럼 스스로 서로의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다양한 건강 주체가 참여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걷기모임이나 등산모임처럼 관심에 따라 모이기도 한다. 다른 의료조합이 소모임을 조합의 꽃이라 하지만, 이미 지역에 선배 단체가 많은 우리 조합은 소모임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대신 주민자치회와 같은 지역 의제 논의에 참여하고 군 보건소의 건강도시활동에도 참여하며 지역에서 역할을 한다. 조합이 잘 되는 것보다 지역이 함께 잘 되는 것을 중심에 둔다.

아이들이 동네의원을 방문했다.
아이들이 동네의원을 방문했다.

우리동네의원, 의사가 하는 일
우리동네의원은 일차의료를 하는 가정의학과의원이다. 가까운 곳에서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통합적으로 진료하는 역할이다. 약물 치료나 시술도 하지만, 생활에서 관리할 수 있는 것에 강조한다. 지역의 전문과나 2차 지역 종합병원으로 의뢰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다른 곳에서 받은 검진이나 검사 결과를 설명하고 추가 계획을 세우거나 약물을 점검하기도 한다.
  동네의원은 규모가 작지만 물리치료실이 있다. 프로 운동선수에게 치료사가 있어 손상을 막고 경기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평생 몸으로 일하는 농민도 몸을 관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래된 통증에도 운동을 챙기고 기능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의사’로 함께 살면서 진료하기 때문에 활동의 경계가 명확지 않다. 지역에서 이런 것을 해보면 어떨까 제안하면 긍정적으로 고민한다. 학교에서 금연교육을 하기도 하고, 의원 직원들이 청소년 대상 진료교육을 나가기도 한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에게 건강퀴즈를 내고, 어린이집에서 동네의원 체험을 오면 반갑게 맞이한다. 면 전체 32개 마을에서 건강교실을 진행한다.
  방문진료도 중요한 일이다. 정기 방문뿐 아니라, 급한 요청으로 나갈 때도 있다. 방문진료는 환자의 삶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많다. 집에 남은 약을 챙기다 보면 필요 없는 약, 엉뚱하게 먹고 있는 약을 확인하기도 한다. 조건이 너무 열악하여 방문 진료만으로 어려운 경우도 본다. 커뮤니티케어처럼 지역사회의 돌봄네트워크가 작동했으면 하는 경우도 있다.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은 경우도 문의를 받는다. 임종의 과정을 가족과 공유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간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어르신의 모습,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은 울림을 준다. 지역의 노인요양기관으로 촉탁의를 나간다. 어르신들에게 익숙함이 중요한 요소라 집에서의 의료와 요양원에서의 연결은 중요한 역할이다.

캡션
방문진료 중 어르신에게 운동을 알려드리고 있다.

지역 주민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과제
“어디라 없이 농촌은 ‘취약’ 지역이, 그리고 농민은 ‘소수자’가 되었다는 것을 절감한다. 농가 수는 6%밖에 안 되는 데다 세 명에 한 명꼴로 일흔을 넘겼다. 경제와 효율만 걱정한다면 농촌을 애물단지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야간 응급 의료 시급, 보건지소에 사람이 없다. 의료원 하고는 싶은데 재정도 엄청난 부담이고, 의료 인력을 구할 수 없다.”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을 리 없으니, 어느 것 한 가지 사람들을 끌어들일 ‘매력’이 모자란다. 임금이 비슷해도 교육이며 생활 여건, 문화, 경력 발전 등이 모두 불리하다.”

답답한 상황이다. 농촌을 도시와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면 낙후된 지역을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인근에 응급의료센터가 있고, 한 블록 건너 다양한 진료과와 최신 장비가 있는 도시민은 병·의원 이용이 만족스러울까? 수많은 최신 기계가 있고 분야별 명의가 있지만, 나를 아는 의사가 없어 큰 병원과 명의만 찾게 되는 게 현실이라 생각한다.
  주민의 건강권을 일차의료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을 제안한다. 도시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주치의를 가질 수 있다. 동네의원의 경험을 보면 농촌이나 소도시에서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 이미 지역을 수십 년간 지켜온 동네의원을 보면 단골의원으로 이미 일차의료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것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안정된 일차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병원 서비스와 연계를 해둔다면 주민들은 농촌이지만 안심하고 살 수 있다.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기존의 장애인주치의 사업이 있기 때문에 이를 대상의 특성에 맞추어 아동주치의나 노인주치의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다. 농촌은 마을 단위로 살기 때문에 지역 병·의원을 연계한 마을주치의 사업도 가능하다. 일차의료 강화를 학회의 중심목표로 삼는 일차보건의료학회나, 가정의학회와 협업사업도 가능하다.
  지방동네의원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 지방은 의료 인력의 고용에 어려움이 있다. 지역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나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등 필요한 인력은 안정적으로 지역에 살 수 있는 거주 공간을 지원하고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 아파트가 아닌 작더라도 정원이 있는 공간이면 도시와는 차별성이 생긴다. 여성과 젊은 인력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공공어린이집을 제공해 보육을 도울 수도 있다. 자연과 생태를 경험할 수 있는 어린이집이라면 좋을 것이다.
  농촌 지역의 개선 방향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농촌을 하나로 보지 않기를 강조한다. 갖고 있는 자원과 문제점이 달라 공통된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지역이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지역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 작은 힘이라도 서로 보태는 협동의 역량이 필요하다. 지역의 의료 문제 해결은 지역 사활이 걸린 중요 의제이다. 행정과 자치의회, 지역의사회와 같은 전문가의 협력 그리고 중앙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의료공공성을 위해서는
한국은 공공과 시장이 혼재된 의료제도로 움직인다. 필수 의료서비스는 보험제도 안에 있어 공공성을 지니지만 의료를 수행하는 병·의원은 대부분 민간이다. 문제는 보험제도를 설계할 때 시장성이 취약한 수가구조가 형성되어서 의료기관이 경쟁 속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농촌이나 가난한 지역은 문제가 생긴다.
  동네의원은 하루 20~30명의 환자를 본다. 8시간 열려있으니 환자 한 명당 15분에서 20분 채워 진료할 수 있는 이상적인 수준이다. 만성질환관리사업을 하고, 방문진료와 촉탁방문을 한다. 중간중간 새로운 일을 기획하거나 진행하여 어떤 때는 정신없이 바쁘다. 해야 하는 일 중 규모를 따지고, 수입이 생기는 사업을 챙기는 데도 동네의원 운영은 어렵다.
  당장 공공의료체계를 중심으로 모든 체계를 바꾸기도 어렵고 완벽한 대안도 아니다. 일부 의료업자나 직업의식을 버린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의사는 수입을 고려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픈 사람을 잘 낫게 하는 역할에 관심이 있다. 시장이 해결하지 못한 지역은 민관협력모델이나 의사-주민협동모델을 통해 운영을 지원할 수 있다. 운영의 투명성을 강조한다면 의료업자도 관리할 수 있다.
  고령화와 늘어나는 의료비, 기술과 환경의 변화에 따른 전반적인 의료 체계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특별히 민간보험은 기형적인 치료를 만들어내고 있다. 강신익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교수는 “한국 의료정책은 유신정권 시절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시작되는 등 사회적 협의 과정이 늘 부실했다”고 한다. 의사와 정부, 공단, 시민사회까지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다.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합의의 중심은 의료비를 지불하고 의료서비스를 이용해야만 하는 국민들에게 있다.
  최근 들어 지역의사회를 통해 군보건소와 자살예방사업, 노인건강증진사업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거나, 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단에서 추진하는 방문진료시범사업, 만성질환관리사업, 장애인 주치의사업도 어렵지만, 지역의사회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작은 사업이라도 꾸준히 진행하여 신뢰를 쌓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도 성급함보다는 기다림과 준비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3 이훈호※필자 이훈호: 홍성우리마을의료생협 우리동네의원 의사, 가정의학과전문의. ‘의사가 동네에서 함께 사는 것’에 관심이 있어 조합 초기부터 함께 하고 있다. 퇴근하면 집안일을 함께 하며 아이랑 노는 아빠이고, 마을에서는 청년회에 나가 마을 길을 청소하는 주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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