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을 아무리 높게 준다 해도 생활 여건이 좋지 않은 지역에는 의사가 아예 오지 않는다는데 시골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불가촉천민인가보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진대 그런 말들이 왜 그리 아플까. 의사가 오려면 기본적 생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데 그럼 기본적 생활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면 단위 보건지소가 있어 봐야 군 복무 잠깐 마치고 가는 풋내기 의사들만 거쳐 가는 곳일 뿐, 그런 사람이 보건지소장이라고 앉아있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니 의사님을 내려보내신다면 지역이 얼마나 더 준비해야 할까. 보건진료소도 하나둘 없어지고 원래 정주하던 간호사들도 ‘거주 이전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일찌감치 하나둘 떠났을 때, 활용 가치가 점점 사라지는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를 바라보며 어르신들은 읍내 병원 출입을 힘겹게 하신다. 버스 한참 타고 가서 또 기다리고 진료받고 하는 것이 일상다반사. 오가다 병이 날 정도다. 의료기본권 자체가 일찌감치 무너진 이곳의 사람들은 의료 내핍 상태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상화된 농촌, 타자화된 농촌은 의사도 가기 싫어하는 지역이 되었다. 몇 년 동안 살아야 한다는 족쇄를 걸어놓지 않고서는 거주할 수 없는 지역,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 무언가. 모셔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거기 사는 사람들을 위해 개선해야 한다는 말이 힘들었을까. 어디 의사뿐일까. 교사도 공무원도 시골 농촌에는 살지 않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주목받는데, 가장 가까운 병원이 가장 좋은 병원이고 가장 가까운 학교가 좋은 학교가 되는 건 도대체 언제쯤 가능할까.
‘보건지소’에 대한 생각들
안내면, 안남면, 동이면 등 보건지소 등을 이용하는 관할구역의 주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건지소가 어떻게 이용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벌 쏘여서 보건지소 가면 읍내 병원 가라고 해요. 몇 번 갔다가 자꾸 읍내 병원 가라고 하면 안 가죠. 거기 가면 시간만 낭비할 텐데. 차라리 그냥 읍내 가고 말지.”(A씨, 안남면, 48)
“어린이 약은 아예 없어요. 애들 아프면 소아과 약은 없다고, 아이들 진료는 안 한다고 읍내에 가라고 해요. 애들 약 가져다 놓아도 잘 안 써서 방치되고 유통기한이 지나니까 아예 안 갖다 놓는다고 그래요. 면에 급하게 아파서 약국이라도 갈라치면, 약국이 어디 있나요? 편의점도 없는데. 상비약을 구할 곳이 없어서 아프면 30분가량 차 타고 읍내 병원 가야 하는 걸로 알고 있죠.”(B씨, 안내면, 53)
“보건지소야 뭐 할머니들 당뇨약, 혈압약 챙겨주는 거 정도, 그리고 가끔 물리치료 해주고, 한방의 와서 침놓는 정도인데 그것마저도 점점 없어져요. 옛날에는 치과 진료도 했는데 그것도 슬그머니 빠지더니 이제 물리치료실도 다 빠져 보건소에서 통합 운영한다고 하대요. 면사무소 옆에 보건지소가 있는데, 있으면 뭐해요. 할머니들 약 챙겨주는 것 그 이상으로 발전이 없어요. 그런 할머니들도 장날 읍내 구경한다고 겸사겸사 읍내 병원으로 출입하시니 보건지소의 존재감이 별로 없어요.”(C씨, 안남면, 65)
“농사일하다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외과 진료가 필요한데 안 하거든요. 엑스레이도 없고 읍내 일반가정의학과만치도 못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만성질환 앓는 할머니들 가는 데가 딱 보건지소예요.”(D씨, 안남면, 73)
“뉴스에서 지역에 공공의료를 확충한다 뭐다 떠들어대지만, 지금까지 공공의료를 제대로 하기나 했나. 예산 없다고 줄이고 감축하고 없애고 하는 게 전부인데. 옥천에 오지에 있는 보건진료소가 20여 개 있었는데 5~6개 없앤 게 옥천군이에요. 보건진료소 없앤다고 했을 때 주민 반발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데모하고 찾아가서 안 된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더라고요.”(E씨, 동이면, 76)
갈수록 열악해지는 농촌 의료환경
지근거리에 병원이 없다는 게 상상이나 되는가. 버스 타고 30분가량 가야 병원과 약국을 접할 수 있다는 게 믿겨지는가. 시골 농촌은 그렇다. 도시 사람들은 보건소는 알아도 보건지소, 보건진료소의 개념은 잘 모를 것이다.
군 단위 농촌의 면에는 보건지소와 진료소가 있어야 하지만 일찌감치 사지말단까지 뿌리내린 보건진료소를 하나둘 없애더니 보건지소만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보건지소에 있던 물리치료실도 2020년 1월부터 군 보건소로 다 통합하고 한의사를 돌리면서 공백을 채우는 시늉만 하고 있다. 예산을 핑계로 효율을 이유로, 가장 약한 곳부터 툭툭 건드리면 무너지게 되어있다. 소수자들 의견이야 가볍게 뭉개면서 사람 없는 곳에 투자 대비 효율이 없다는 등 자본의 논리를 들이밀며 함부로 통합시킨다. 그것이 바로 공공성이 약화되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뿌리내리며 교통했던 관계의 끈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체계의 말단으로 기능하게 하면 그 필요성은 더 약화된다. 그러면 또 하나둘 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보건진료원이 돌아다니면서 방문진료를 하지만 보건진료소가 비어 있을 수밖에 없어 기존 관할 구역에도 피해를 주게 된다. 그렇게 관계성을 끊어버리면 체계는 조직을 자율적으로 통폐합하기 용이하다. 주민과 접촉면이 줄어들면 반발도 적을 것이며 그렇게 줄여나가는 것이다. 아마 간호사 한 명만 파견되어 있는 보건진료소는 이제 학교 폐교와 마찬가지로 점점 사라질 것이다. 교통이 편리해져 버스 한 번 타면 병원에 갈 수 있기 때문에 보건진료소가 필요 없다는 것인데, 정말 그러한가. 버스를 타는 시간과 비용은 과연 누구의 몫으로 남는가.
저상버스도 아닌 승차감 제로인 덜컹거리는 농촌버스 타다가 멀쩡한 관절도 고장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높은 계단을 올라가다 먼저 출발하는 버스, 손잡이만 잘못 잡으면 그대로 삐끗한다. 높은 과속방지턱 하나 넘을 때마다 쿵쿵, 뼈마디 관절이 쑤신다. 구불구불 덜컹덜컹 멀미를 동반한 40~50분 버스 타기는 사실 고난의 행군이다. 몇 번 갈아타야 할 때 제시간에 버스가 안 오면 비가림막도 없는 정류장에서 의자 하나 변변찮은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민주성’조차 사라진 농촌 보건 체계
“보건진료소는 이전처럼만 운영한다면 좋겠지요. 보건진료소 옆 사택에서 보건진료원들이 거주해야 했고, 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가 15명 정도로 구성되어 진료소 운영에 전적으로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합의가 있어야 했거든요. 물건 하나, 약품 하나 구입할 때도 주민인 운영협의회장의 결재를 받았어요. 얼마나 민주적입니까. 그런데 이런 민주적인 절차도 허물어집디다.”(76, 김호일, 전 옥천군 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장)
간호사인 보건진료원을 채용할 때는 보건진료소 인근에 거주해야 하고 그 지역에서 이탈할 수 없었다. 물론 뽑힐 때 그런 법규와 규정으로 뽑았지만, 진료원들은 어떻게든 이 규정을 없애려 했다. 도시에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육, 문화 환경이 도시보다 열악했던 시골에 근무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는지 이들은 지속해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이 규정을 폐지하도록 움직였고 2007년 즈음인가 이 규정은 없어졌다.
당시 보건진료원들은 그 지역의 건강 주치의나 다름이 없었다. 그 지역 주민으로 살면서 지역 상황을 소상히 알아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마을에서는 부부싸움이 나도 괜한 소문이 날까 하소연할 데가 없었는데 보건진료소에 와서 시시콜콜한 이야기 다 하면서 풀기도 했다. 보건진료소는 면사무소보다 가까운 완충지대였던 셈이다. 약 타러 마실 가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지역의 문제가 풀리기도 했다. 가슴이 따뜻했던 보건진료원들은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을 남모르게 챙겨주기도 했다. 실거주하지 않아도 되고 타지역 보건진료소로 전근 시기가 짧아지면서 두터웠던 관계도 소원해졌다. 주민들로 구성된 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도 의사결정기구에서 자문기구로 전락했다. 분기별로 모이긴 하지만, 의견만 내는 정도다. 관계성과 공동체성이 순식간에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로 변모되었다. 이런 변질된 방식은 나름 전문성, 효율성을 근거로 둔다. 전문성과 효율성만이 알맹이인 줄 착각하는 탁상 전문가들이 많다. 그 알맹이를 둘러싸고 있는 외피와 알맹이 속의 씨앗들은 전혀 보지 않고 말이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의 공공의료 체계의 그림이 그려진다. 사지말단으로 면 지역 오지 거점까지 침투한 보건진료소의 싹을 잘라버리고 아마도 보건지소도 통합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관계형 의료를 제거하고 체계형 서비스를 대신하는 쪽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크다.
보건지소는 그나마 운영위원회 자체가 없다. 간호사와 공보의로 구성된 것이 전부다. 보건지소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민의를 수렴하는 절차가 아예 생략되어 있다. 그냥 정말 최소한으로 해놓은 것이다. 이런 지소에 누가 자주 많이 가겠는가. 이처럼 공공의료는 방치되어 있고 읍내 병원은 노인 환자들 때문에 돈을 많이 번다. 장날이 아니라도 아침부터 줄 서 있는 노인들은 그들에게 다 ‘돈’이다. 지역 의사들의 90% 정도는 그 지역에 살지 않는다. 인근 대전에서 다 출퇴근한다.
공공의료, 민주성과 관계성 위에 뿌리내려야
보건진료소와 보건지소가 의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방치한 그 틈새로 시골 의료 시장이 열렸다. 물론 공보의도 간호사도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래서 많이들 칭찬도 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단단히 잘못되었다. 어떤 지향도 비전도 없다.
농촌은 사실 지금도 떠나고 있다. 엑소더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보건지소와 진료소가 계속 유지만 되기를 바라는 주민들은 여전히 있다. 노인들이 그렇다.
“보건지소에 오는 게 가깝고 편리하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가격도 싸고 당뇨약, 혈압약, 기침할 때 오는데 그나마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여. 좋지. 암만, 꼭 있어야 돼.”
“우리 보건진료소 있으니까 얼마나 편한데요. 체조도 하고, 건강상담도 하고, 약도 챙겨주고 진료소 없으면 안 돼요. 할머니들한테 꼭 필요한 곳이에요. 더 이상 진료소가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들이 아직까지 보건지소와 진료소가 남아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 한 줌의 이유로 면 지역 농촌 공공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농촌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의료서비스가 필요하다. 공공의료는 민주성과 관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아무리 전문적 지식이 없고 의료에 무식한 주민이라도 운영위원회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성은 그런 보편적인 주민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민주성이다. 민주성도 덩어리가 커지면 가치가 희박해진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만큼의 커뮤니티 구성이 그래서 중요하다. 적절한 공동체에서 민주주의의 효능감은 커진다. 공공의료는 이런 민주성과 관계성 기반 위에 자리잡혀야 한다.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은 주민들을 이해시킬 책무가 있고 여러 주민들은 합리적인 결정을 위해 의견을 모아야 한다. 이 과정들이 생략되면 모든 일들이 빠르게 진척될 수 있겠으나 민주주의는 아닌 것이다. 생활권이 같은 공동체 속에 공공의료가 자리 잡는 것이 적합하다. 그런 공동체 속에 공공의료가 싹이 트길 바란다. 옛 보건진료소가 그렇게 운영되었듯이 사지말단까지 민주적인 공동체 공공의료가 뿌리내리길 바라는 바이다.
※필자 황민호: 옥천신문 상임이사 겸 제작실장. 2002년부터 옥천신문 기자로 재직해왔다. 10년이 되던 해 옥천살림에서 공공급식배달을 3년 동안 하고 다시 신문사로 복귀해 일을 하고 있다. 3년 동안 청산면에서의 생활, 3년 동안 공공급식배달이 신문사 기자 활동을 하는데 큰 자양분이 됐다. 지역의 공공성을 키우고 살맛 나는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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