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근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관
바깥은 추위가 한창인데, 농장엔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다. 싱그러운 여름을 오롯이 옮겨놓은 듯, 온실 안에는 무성한 초록 잎들 사이로 빨강, 주황, 노랑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경남 진주시, 국산 미니파프리카 ‘라온’을 재배하는 한 농가에서 안철근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관(52, 제28회 대산농촌상 수상자)을 만났다. 그가 건네준 라온을 한입 베어 무니 아삭, 소리가 시원하게 퍼졌다.
우리 농가의 환경에 맞는 품종을 만들다
안철근 연구관은 1995년 경상남도농업기술원에 부임하여 ‘파프리카’ 연구를 시작했다. 1993년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파프리카는 선명한 색깔을 가진 단맛의 채소다. 샐러드 또는 볶음 요리에 활용하기 좋고 비타민C, 베타카로틴, 식이섬유 등 영양소 함량이 풍부한 것이 장점이다.
파프리카의 일본 수출량이 많아지면서 국내 재배 면적이 점차 늘어났는데, 농민들은 ‘금보다 비싼 종자Golden seed’에 큰 부담을 느꼈다. 한 알에 200원이었던 종잣값은 몇 년 만에 500원을 넘었고, 우리나라는 연간 100억 원 이상의 외화를 지출했다. 국산 품종 개발과 대체 작목의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2003년 네덜란드에 갔을 때 미니파프리카를 처음 봤어요. 맛이 굉장히 달더라고요. 한국에 가지고 오면 좋겠다 싶었죠. 소비자 반응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착과가 잘 안 되고, 병치레도 잦았어요. 유리온실에 맞는 품종이었던 거죠. 네덜란드에는 비닐하우스가 없잖아요.”
안철근 연구관은 우리 농가의 환경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하여 10여 년을 몰두하였고, ‘라온’을 비롯한 국산 미니파프리카 품종 13종을 세상에 내놓았다.
“파프리카는 환경이나 기술력이 안 맞거나, 시설이 좋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않아요. 그런데 라온은 과실이 쉽게 달려요. 착과력이 좋은 부계를 써서 그래요. 힘이 센 아빠, 예쁜 엄마 사이에서 두 장점을 가진 자식이 태어난 거죠.”
새로운 작물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미니파프리카
국내 파프리카 농가는 전국에 500여 곳이 넘는다. 최근에는 강원도 재배 면적이 크게 늘었다. 파프리카를 고랭지 채소의 매출을 대체할 틈새 작물로 판단한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12월이면 끝나야 하는 수확 시기를 늦추는 농가가 늘어나면서 수확량이 점점 많아졌다.
“생산량이 소비량을 넘으면서 농산물값은 떨어지고, 수출에도 영향을 미쳐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깨진 거예요. 기존에 파프리카 농사를 짓던 분들이 고추, 토마토로 작목을 바꾸었을 때 고추, 토마토 가격이 폭락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농산물이 5%만 늘어도 값은 반으로 떨어지고, 5%만 모자라도 값이 배로 오르는 비탄력적인 구조거든요.”
파프리카 재배 농민들은 새로운 작물을 시도할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초기 투자 비용과 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다른 부서로 발령 나면 굉장히 당황스러운데, 농민은 어떻겠어요. 파프리카를 재배하던 농민이 고추, 토마토 농사지으려면 머리가 하얘질 거라고요. 이분들이 미니파프리카를 보니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거죠. 내가 이 정도로 인사를 받아도 되나, 생각이 들 정도로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때마다 굉장한 보람을 느꼈어요.”
안철근 연구관은 파프리카 재배 면적 700ha에서 미니파프리카 ‘라온’이 100ha를 차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면 파프리카 가격이 훨씬 안정적으로 바뀔 거라는 것이다.
“미니파프리카 재배 농가가 늘어나면, 기존의 파프리카 재배 농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갑니다. 왜냐면 파프리카 재배 면적의 20%만 가져와도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맞거든요. 미니파프리카는 또 다른 시장입니다.”
안철근 연구관은 글로벌 종자 회사를 상대로 세계 시장에서 국산 파프리카 품종의 경쟁력과 가능성을 높이기도 했다. 생식용 파프리카 시장을 개척하여 일본에 연간 50t을 수출하는 한편, 멕시코에 종자를 수출하고,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서 시범 재배를 하고 있다.
좋은 종자는 기본, 농민과 소비자를 함께 바라본다
2020년 12월, 경상남도농업기술원은 바나나처럼 긴 고깔 모양의 ‘바나나형 파프리카’ 3개 품종을 보호 출원했다. 안철근 연구관은 “과실 크기를 기존 파프리카보다 30% 줄이고, 과육 두께를 늘려 쉽게 물러지지 않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품종 다양화를 통해 파프리카 소비를 늘리고, 수출시장을 개척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진행 중이다.
“후배에게 열매가 작은 수출용 품종을 만들어보라고 과제를 내줬어요. 쉽지 않은 일이죠. 저도 못 만들어요. 제가 가진 틀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 후배는 달라요. 색다른 뭔가를 만들어낼 것 같아요. 제가 아는 것을 조금씩 알려주면서 스스로 시도하도록 돕고 있어요. 제가 가진 걸 그대로 주면, 후배도 제가 한 것밖에 못 만들 테니까요. 자신의 것을 만들도록 해야죠.”
후배들이 자신의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안철근 연구관은 26년의 경험을 하나씩 전하고 있다. 특히 유통과 마케팅에 관여하면서 깨달은 바를 강조했다.
“좋은 종자를 만들면 당연히 잘 팔리겠지,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품종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과정이지만, 사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건 마케팅이었어요. 예전에는 병과 충에 강하고, 생산량이 많고, 착과가 잘 되는 품종에 집중했어요. 그런데 생산자만 좋아하는 걸 만들면 소비자라는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 해요.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파악해서 반영하는 것도 중요해요.”
파프리카 연구 26년. 누구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이었지만, 그가 혼자 걸었던 길은 아니다. 지금껏 어려울 때마다 “할 수 있다”며 용기와 지지를 보내준 농민과 함께 만든 길이다. 농업연구자가 되기를 참 잘했다며 환히 웃는 안철근 연구관의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