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민 말고 ‘농촌 주민’을 바라보라

2003년 1월, 도시물을 가득 머금은 초짜 하나가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을 갖고 산골짜기 마을로 들어오던 때가 떠오른다. 춘천댐 상류 5개리 900여 명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 아침저녁 화천으로 출퇴근하는 차들을 제외하고는 타지인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이다. 도시에서 바라본 농촌은 여유로운 노년기를 보내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름다운 풍광 뒤에서 질곡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도시민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귀농 후, 그 속에 치열한 생존 현장의 모습도, 국회에서나 볼 법한 다툼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농촌 마을.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한 폭의 그림 같은 농촌 마을.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도시민을 짝사랑해야 ‘성공’하는 농촌지원사업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농촌 발전을 위해 애쓰고 열심인 이장님들 덕택에(?) 온갖 사업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보화마을사업, 체험휴양마을사업, 1사1촌사업, 생태산촌마을사업에 급기야 농촌종합개발사업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간 고탄 5개리(고탄리 주변 5개 마을)가 지원받은 정부 지원금은 대충 어림잡아도 100억 원이 넘는다. 순진한 농민들에게 수억, 수십억 원의 지원예산은 한없이 부풀려진 장밋빛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역량 강화 교육과 선진지 견학, 회의, 행사 등 누군가에 의해 잘 짜여진 순서에 맞춰 농촌 사람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착하게 따라갔다. 그동안 마을에는 건물이 여러 개 생기고, 언론에 노출되고, 여기저기서 상도 받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고 하면 내 평가가 너무 박한 걸까?
 주민들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마을사업이라는 것이 또 다른 사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어, 원치 않는 사업도 받아야 했다. 그래야만 마을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였다. 행정기관의 담당 부서도 성과를 위해서 지금껏 큰 문제가 없던 마을에 사업을 제안하고 유도하는 양태를 보였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느낌이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괴로움은 오로지 주민들이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우울한 그늘이었다. 새벽부터 일해서 피곤한 주민들을 밤마다 마을회관으로 불러모아 이해하기 어려운 사업계획서를 들이밀고 수많은 회의와 교육을 해야 했다. 어쩌다가 ‘이런 거 하면 안 될까?’ 고심 끝에 제안한 의제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는 이유로 결국 컨설팅 업체가 하라는 대로 진행되기 일쑤였다. 상향식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농촌 주민들은 여기서도 주체가 아닌 들러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촌에 수없이 쏟아지는 지원사업들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권장하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다. 도농교류, 농촌관광, 도시민체험 등 도시민을 향한 짝사랑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 그것이다. 농촌에서는 도시민에게 최상의 마을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들을 끌어들이고, 돈을 번다고 말하기도 무색한 농가소득을 올리라는 것이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이장을 할 때도 도시에 있는 몇 개의 단체․기업과 1사1촌을 맺고 체험행사, 도농교류를 한 적이 있다. 2년 정도 지났을 때 마을 대동회가 끝나고 마을부녀회 소속 아주머니들이 면담을 요청하셨다.
 “이장, 도시민들 오는 게 마을에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제 부녀회 사람들도 순 할머니들이니 그만하면 안 될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농교류 행사를 중단했다. 마을부녀회 아주머니들(사실은 할머니들)이 고생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잘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행사 며칠 전부터 시간을 내어 마을을 쓸고 닦고, 음식을 차리고,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모두 부녀회의 몫이었다.

‘도농교류’라는 이름으로 관광지가 되는 농촌,
농촌마을개발은 지역민을 힘들게 한다
“어떤 마을은 그 가격에 옥수수 따기도 하고, 감자 두 개도 서비스로 구워준다는데요.”
 체험휴양마을로 명성을 날리던 옆 마을 사무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쳇말로 ‘밀당(밀고 당기기)’ 하는 유치원, 학교 선생님의 태도가 가관이었다. 도시민이 찾아준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냐는 인식에 기인해 부끄러움이나 예의를 모르는듯했다. 도대체 농촌을, 농민을 뭐라 생각하는 건가. 농촌에 오랫동안 살면서 지켜본 결과, 소위 도농교류라는 이름으로 도시민을 끌어들여 소득을 올리겠다는 갖가지 사업은 대부분 실패한 듯 보인다. 이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러나 농촌을 관광지로 만드는 지원사업은 이름만 바꿔 여전히 진행형인 것 같아 씁쓸하다.
 도시민들이 농촌을 찾아 땀을 흘리고, 농민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농의 가치를 배우고 익히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동화된다면 무얼 더 바라겠는가. 아마도 정책을 만드는 분들께서는 이를 목적에 두고 사업을 추진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농촌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농촌에 재방문하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인솔하는 교사들이 같은 체험활동이라도 무엇을 추구하며 진행하는지, 그래서 어떤 의미와 가치로 연결하는지 살펴야 한다. 놀이공원 프리패스 끊고 놀러 가듯 농촌을 소비하는 도시민, 사람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여 체험객 숫자로 다음 지원사업 계획서에 한 줄 더 쓰려는 마을만 남게 된다면 아무리 큰 노력과 예산을 들여도 본래의 취지나 목적에 맞춰 농촌을, 농민을, 농업을 영속시키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허울뿐인 농촌사업은 지역민을 더 힘들게 한다. 한 마을의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을 연이어 맡게 되면서 5개리를 묶어 권역을 구성하고 50여억 원이 넘는 예산을 쓰는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에 5년간 깊이 참여한 적 있다. 사업은 간신히 종료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소득사업 시설물은 마을(리)로 뿔뿔이 흩어졌고, 주민들 간의 깊은 상처와 아픔만 남았다. 권역운영위원회는 명목만 남아 유명무실해졌고, 5개리의 공공시설물인 커뮤니티센터community center는 준공 후 2년간 주인을 잃은 채 빈 곳으로 남아있었다. 우리 마을의 사례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농촌마을개발사업이라는 것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니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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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농촌과 자연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아이들은 농촌과 자연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작은 학교’에 눈을 돌리다
귀농을 하고 주민들과 부대끼며 시골살이에 익숙해질 때 즈음, 마을의 아이들과 작은 학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아이와 여성은 비주류였고, 수많은 개발사업비가 쏟아져도 이들을 위한 사업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코로나 시대에 도시건 농촌이건 아이들의 돌봄과 교육 문제가 큰 화두지만, 귀농 당시인 2005년경 농촌에서 아이들 교육은 학교와 엄마들이 책임지면 되는 문제로 치부되었다. 방과 후에 갈 곳이 없는 데다 동네에 또래가 없어 홀로 방치되는 아이들, 농사일과 집안일로 고된 삶의 노동에 아이들을 챙길 여유조차 없는 엄마들은 마을에서도 비주류로 살아가고 있었다. 출근하는 아내를 둔 나도 유치원에 다녀온 큰딸을 데리고 농사를 지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40도를 오르내리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아빠 옆에서 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덥고 심심하니 나가서 놀자며 보채는 아이를 트럭에 태우고 한낮 더위를 피해 공지천으로, 계곡으로 다닌 적도 많았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부모들을 모았다. 다들 학원 차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방과 후 아이 돌봄이 간절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터였다. 마을에서 우리가 스스로 방과 후 공부방을 만들어보자는 내 제안에 흔쾌히 동의해 주었고 몸과 맘을 모아주었다. 지금 별빛사회적협동조합의 첫 출발점이다. 이후 마을에 있는 작은 학교에 학생 수가 줄어들어 폐교 논의가 되기 시작했고, 나는 ‘농촌유학’으로 활로를 찾고자 한 발 더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농촌유학은 우리가 뭘 잘해야 하는 문제를 넘어서는 다양한 고민이 필요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간이나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농촌에 아이를 전학시킨다는 것은, 도시민의 농촌에 대한 인식과 신뢰 그리고 작은 학교 교육에 대한 깊은 고민과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별빛산골유학센터의 아이들은 농촌의 품에서 함께 살아간다.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별빛산골유학센터의 아이들은 농촌의 품에서 함께 살아간다.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돌봄에서 농촌유학으로, 농촌 주민이 주체가 되다
‘나라면 농촌 사람들을 믿고 보낼 수 있을까?’
‘농촌유학을 보내서 아이가 얻을 수 있는 건 뭐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 있어야 했다. 철저히 도시민의 입장에서, 도시 부모의 관점에서 농촌을 바라봤다. 2007년 겨울, 농촌체험캠프를 통해 도시 부모와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여느 마을에서 하는 캠프와 달라야 했다. 도시 아이가 스스로 부모와 떨어져 시골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결정하는 단초가 되고, 도시 부모에게 무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맛보기 시골살이여야 했다. 또 마을주민들이 학생들을 우리의 아이들로 맞을 수 있느냐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9박 10일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숙박, 체험 강사, 먹거리 등 최대한 마을주민들과 함께하는 방식을 취하자. 농촌에서 계절에 맞는 놀이는 다 해보자. 시간을 여유롭게 가지고 자유롭게 참여를 결정할 수 있게 하자. 휴대폰, 용돈 등 도시와 단절할 수 있는 결핍의 날을 경험하게 하자. 캠프 기간 동안은 도시 부모의 개입을 최소화하자.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처음 모집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이들과 도시 부모의 만족도는 최고였다. 방학 기간을 활용한 단순한 자연캠프와는 차별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 캠프를 통해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있다. 아이들은 농촌과 자연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첫날 낯빛 어두웠던 아이들이 농촌의 들녘에서, 마을 뒷산과 개울에서 자유롭게 놀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시작한 별빛산골유학센터는 2021년을 맞는 지금까지 10년째 진행 중이다. 입소문과 함께 농촌유학에 대한 문의는 지속되고 있고, 춘천 시내에서 전학 오는 아이들도 늘었다. 여러 귀농·귀촌자들이 아이들 교육을 생각하며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이 마을이 고향인 토박이 아이는 이제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40여 명의 도시 아이들이 시골의 작은 학교 교실을 채우고,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도시의 부모들이 시골로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이사까지 오면서 자연과 농촌에서 키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학부모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아이들의 표정이 바뀌었어요.” “저렇게 밝고 웃음 많은 아이인지 몰랐어요.” “유학 농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렇게 잘 돌봐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뭐 대단한 체험이나 수준 높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아니다. 그저 농촌의 품으로 아이들을 데려와 손님이 아닌 한 식구로 함께 살아갈 뿐이다.

농촌을 살리는 농도교류의 전환이 필요할 때
농촌유학은 하나의 실천적 사례일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른 도농교류사업이나 농촌관광, 농촌체험과 달리 매력적이고 의미를 갖는 것은 일회성 사업이 아닌 농의 가치(교육적 가치 외에도 먹거리, 관계, 생태 등)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느끼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정책이나 사업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분을 농촌 주민과 도시민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며 ‘우리는 이웃이며 공동체’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농촌을 살리는 농촌관광, 농도교류사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농촌 발전은 수억, 수십억 원의 지원예산만으로는 안 된다. 도시를 향한 짝사랑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농촌은 하나의 사회이며, 농민은 그 사회를 이루는 국민이고,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농촌 주민들이 농의 가치를 느끼고 주체성을 가질 때, 도시민들도 농촌을 대하는 관점과 방식이 바뀔 것이다.

필자사진(윤요왕)※필자 윤요왕: 재단법인 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 센터장. 도시에서 살다 2003년 춘천의 시골 마을로 귀농했다. 농사도 짓고 이장으로 마을 일도 보면서 마을주민들과 별빛사회적협동조합(마을공부방, 농촌유학센터, 노인살림센터 등)을 설립했다. 농촌이 ‘아이 키우기 좋은 마을, 나이 들기 좋은 마을, 청년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