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기르는 농민, 농민을 기르는 학교

김형신 제주보타리농업학교 농업회사법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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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시 애월읍, 제주보타리농업학교에서 김형신 대표와 교육생들이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음력 2월이면 풍농신豐農神 ‘영등할망’이 제주를 찾아 땅과 바다에 씨를 뿌린다는 설화가 있다. 애월읍에도 영등할망이 다녀갔는지, 까무스름한 땅에 초록색 새싹들이 올망졸망 돋았다. 김형신 제주보타리농업학교㈜ 농업회사법인 대표(60, 제29회 대산농촌상 농업경영 부문 수상자)는 교육생들과 함께 작물을 살피면서 어린잎이 시금치로, 옥수수로, 호박으로 온전히 자랄 때까지 농민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꼼꼼히 설명했다.

김형신 대표는 “예전에는 교육생들에게 ‘내가 해보니까 되더라’라고 말만 했지만, 이제는 학생들이 내 농사를 재현할 수 있는지 중점을 두고 교육한 다”고 말했다.
김형신 대표는 “예전에는 교육생들에게 ‘내가 해보니까 되더라’라고 말만했지만, 이제는 학생들이 내 농사를 재현할 수 있는지 중점을 두고 교육한다”고 말했다.

기계과 교사에서 유기농민으로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김형신 대표는 졸업 후 중공업 회사에서 일하다, 부모님의 권유로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 20년 가까이 교사로 지냈다. 그런 그가 친환경 농업을 시작한 것은 학생들을 살피면서 보게 된 광경 때문이었다.
  “1993년에 어느 농업계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는데 아이들이 수시로 수업을 빠지는 거예요. 따라가 봤더니 학생들이 학교 밭에서 농약을 뿌리고 있어요. 완전히 충격이었죠. 그해에 아버님이 농약 중독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안전장비도 없이 제초제를 뿌리게 하냐고 실습 담당 선생님이랑 한바탕 붙었어요.”
  그때 “(기계과 교사인) 당신이 농사를 알아?”라는 말을 듣고, 김형신 대표는 본격적으로 농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환경 농업에 관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였기에, 그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직접 재배한 유기농 자몽을 들고 환히 웃고 있는 김형신 대표.
직접 재배한 유기농 자몽을 들고 환히 웃고 있는 김형신 대표.

  “처음에는 나더러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학교에서 음식물쓰레기가 나오면 전부 발효시켜서 감귤밭에 묻는데 누가 이상하게 안 보겠어요. 게다가 나는 기계과 선생인데 원예과, 축산과에 더 관심을 보이니까 선생들이 반길 리가 없었죠.”
  2003년, 김형신 대표는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청원휴직을 신청하고 제주대 농과대학에서 원예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해 제주보타리농업학교의 전신인 제주보타리친환경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지역의 토양과 기후를 분석하여 그곳에 꼭 맞는 생태 농업을 개발하고 실천하면서 서서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2020년 10월 새로 건축한 제주보타리농업학교 체험장 전경.
2020년 10월 새로 건축한 제주보타리농업학교 체험장 전경.

서로 소통하며 배우는 제주보타리농업학교
김형신 대표는 ‘맨땅에 헤딩’ 하면서 익힌 기술을 농촌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누군가 친환경 농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일단 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제주보타리농업학교에 다녀간 교육생만 3만명 가까이 된다. 학생들은 약 9900평의 농장에서 39개 품종의 채소류, 과일류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차근차근 농사를 배웠다.
  “옛날에는 내가 따라다니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했어요. 홈페이지나 페이스북에도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했죠. 나중에 보니 그게 다 자랑질인 거예요. 이제는 교육생들이 직접 밴드에 글을 올리게 해요. 거기에 궁금한 점을 적어놓으면 내가 조언하는 방식인 거죠. 학교에서 모종을 심든, 음식을 하든, 본인이 그 내용을 정리해서 올리면 각자의 지식이 되는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밴드의 내용이 굉장히 풍부해졌어요.”

김형신 대표와 그의 제자들.
봄이 찾아온 제주보타리농업학교에서 김형신 대표와 교육생들.

  김형신 대표는 스마트폰을 꺼내 회원 수가 200명이 넘는 제주보타리농업학교 밴드를 보여줬다. 화면 속에는 누군가 봄맞이 호박을 심고, 무청으로 김치를 담그고, 학교에 핀 꽃을 관찰하는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2020년 2월에 화재를 겪으면서 제 마인드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전까지는 자료를 공개하려고 하지 않고 다 숨겼죠. 제가 쌓은 노하우니까요. 그런데 그게 사정없이 물거품이 된 거예요. 왜 나 혼자만 가지려고 캐비닛 속에 꽁꽁 담아놨을까 후회했어요. 소통의 세상에 김형신을 던졌으면 다 남아있을 거 아닙니까.”
  김형신 대표는 지금의 교육생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제주보타리농업학교의 ‘진짜 주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격 앞으로! 나를 따르라!” 외치며 늘 선두에 섰던 그는 이제 교육생들의 뒤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스승이 되기로 했다.

마라도 등대공원에 심어질 ‘보타리 표’ 감귤나무 묘목들.
마라도 등대공원에 심어질 ‘보타리 표’ 감귤나무 묘목들.

‘보타리 표’ 감귤나무와 막걸리
2022년 6월,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에 제주보타리농업학교의 이름이 새겨진다. 새롭게 단장하는 등대공원에 감귤나무 10여 종, 20여 그루를 심기로 협의하였기 때문이다.
  “마라도 땅에는 소금기가 있어서 감귤나무가 적응하지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보타리학교의 흙을 가져갈 겁니다. 절반은 보타리학교, 절반은 마라도의 흙으로 나무를 키우는 거죠. ‘보타리 표’ 감귤나무를화분에서 옮겨 심을 준비를 하고 있어요.”

김형신 대표가 마라도 지역민에게 ‘방풍막걸리’ 제조법을 교육하고 있다.
김형신 대표가 마라도 지역민에게 ‘방풍막걸리’ 제조법을 교육하고 있다.

  평소 마라도에 애정을 가지고 자주 오가는 김형신 대표는 그 지역에서만 만들 수 있는 특산주를 개발하기도 했다. 해풍을 맞고 자라난 방풍나물을 곱게 갈아 고두밥, 누룩, 감초 등을 섞어 막걸리를 빚는 것이다.

마라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풍초.
마라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풍초.

  “마라도의 방풍나물과 제주 삼다수로 생막걸리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에요. 마라도는 해수를 담수화해서 쓰는데, 이 물로 술을 만들면 발효가 안 돼요. 그래서 삼다수로 도전을 한 거죠.”
  마라도에서 막걸리 제조법을 시연하는 날, 김형신 대표는 “하루 두 번씩 아침저녁으로 술을 저어줘야 한다”며 “모든 것은 정성과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형신 대표는 ‘기다림’에 관해 자주 이야기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사람을 키울 때도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농사는 한 방이 아니에요. 특히 친환경 농업을 할 때는 기다림 속에서 자연을 음미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농부가 될 수 있어요.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어요. 여유를 가지고 즐겨야 해요. 그게 보타리학교가 가야 할 길이죠.”
  보타리는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뜻의 제주 방언이면서, ‘보금자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친환경 농민들의 보금자리와 같은 이곳에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