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커보어의 시대
로커보어Locavore란 지역을 뜻하는 ‘로컬local’과 먹을거리를 뜻하는 접미사 ‘보어vore’의 합성어로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생산한 먹거리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이러한 소비 트렌드를 일컫는 말로 우리의 ‘신토불이’와 일본의 ‘지산지소’와 맥락을 같이한다. 2007년 옥스퍼드사전에 올해의 단어로 등재되면 서 널리 알려진 ‘로커보어’는 고가의 지역 식자재를 사용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이용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자신의 집 정원을 키친 가든으로 바꾸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로커보어는 기후 환경 위기를 심화시키는 먹거리에 대한 반성, 그리고 거대 식량 기업의 이익을 앞세우는 세계 식량 체계의 불합리한 구조를 고민하는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대안적 행동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도시농업과 농부시장의 열풍
이들 로커보어들의 활동무대는 단연 텃밭이다. 로커보어들의 호응 속에서 뉴욕, 베를린, 런던, 일본 같은 거대도시들에 농사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빈곤층의 건강, 교육, 복지 등의 다양한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가는 키워드로 도시농사를 주목한다. 미셸 오바마가 나서서 백악관 마당에 텃밭을 가꾸며 어린이들의 비만과 건강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공간으로서 텃밭의 가치를 설명한다. 많은 지역에서 도시텃밭은 개인의 여가생활 공간을 넘어서 낡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시재생공간으로, 시민 자원 활동과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도시에서 생산한 농산물은 도시 내 파머스마켓에서 판매하고 지역 내의 레스토랑에 공급되어 지역의 미식문화를 만들고 주민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
북미에서 도시농사와 함께 급성장하고 있는 것이 농부시장이다. 농부시장은 생산자인 농민이 스스로 판매자가 되어 농산물을 판매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로컬푸드의 유통공간이다. 로커보어들이 스스로 생산자 혹은 소비자가 되어 함께하는 농부시장의 먹거리는 그 어느 로컬푸드보다 물리적,사회적 거리가 가장 짧아서 전 세계적 도시로 확산 중이다. 미국에서는 1994 년 1,755개소에 불과하던 농부시장이 2012년 7,864개로 4.5배 급증했다. 농부시장은 도시 내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활동의 거점공간이 되고 새로운 소규모 생산자들, 도시에서 농사짓는 젊은 창업자들의 활동무대가 된다.
청년, 생태적 삶 농사에 눈뜨다
로커보어 열풍은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2011년 11월 도시농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 정되고 서울시에서도 1년 뒤 관련 조례가 제정되었다. 도시농업의 생태적 기능, 환경교육 효과와 공동체 회복 등 장점이 주목받으면서 서울시는 2012년을 도시농업 원년으로 선포하고 도시농업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 가고 있다.
각 자치구 단위에서는 시민들의 텃밭농사를 지원하고 옥상 텃밭도 여러 곳에 조성하였다. 문래동 옥상텃밭이 마을공동체의 거점이라면, 홍대텃밭 ‘다리’ 등은 청년세대의 농사체험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시민들은 도시텃밭에서 직접 생산하고 수확하면서 자연과 노동,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는다.
도시텃밭은 개인의 여가생활 공간을 넘어서 낡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시재생공간으로, 시민 자원 활동과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도시에서 생산한 농산물은 도시 내 농부시장에서 판매하고 지역 내의 레스토랑에 공급되어 지역의 미식문화를 만들고 주민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
도시농업이 일상생활 안으로 들어오면서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도 은퇴자, 고령층을 넘어 전 연령층으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청년층의 참여가 눈에 띈다. 기성세대가 만든 치열한 경쟁, 속도의 사회구조에 불편함을 느끼고 기존체제에서 벗어나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탐색하려는 젊은이들 상당수가 농사에서 큰 영감을 얻고 있다. 이들은 직접 귀농·귀촌에 도전하거나 농업분야에서 창업·창직을 하는 등 도시농사에서 자신들의 꿈을 펼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도시양봉을 하고, 캠퍼스 텃밭을 일구던 대학생 동아리는 농사짓는 협동조합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도시농사의 수확물을 판매하며 얻은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동아리를 지원하고, 장애인을 위한 텃밭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을 만든 이들도 있다. 옥상텃밭을 중심으로 로컬채소브랜드를 만들고 지역의 카페와 계약재배하고 텃밭채소를 이용한 병조림을 생산해서 농부시장에서 판매하며 도시 반농半農의 자급생활을 실험하기도 한다.
이들 젊은이들에게 도시농사는 고용불안과 취업의 어려움이 계속되는 사회 속에서 삶의 자립을 돕는 기술이고 생명을 기르는 몸의 감각과 기능을 일깨우는 훈련이다.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사회 속에서 의미 있는 일들을 여러 개를 엮어 삶의 자급을 만들어가자는 ‘3만 엔 비즈니스’, 자급농사를 절반짓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자는 ‘반농반Ⅹ半農半X’등은 모두 장기 불황으로 고용불안과 취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 세대들에게 자급 기술과 생태적 삶을 위한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청년 세대의 대안적 삶을 독려하고 있다.
농사가 보이고 농부가 존중되는 시장
서울의 도시농업의 열기는 농부시장의 실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마르쉐@혜화동’ 시장이다. 2012년 처음 시작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과 예술가의 집 마당에서 매월 열리는 이 시장은 농부는 물론 요리사가 만들어낸 다양한 농산물과 먹거리, 수공예가 만든 부엌살림들이 있다.
도시형 먹거리 시장으로 시작한 마르쉐@혜화동 시장은 최근 ‘도시형 농부시장’으로 스스로의 정 체성을 재정립했다. 마르쉐@이 표방하는 농부시장이란 ‘농산물만이 아니라, 농사가 보이고 농부가 존중되는 시장’, ‘농부와의 관계 속에서 재료를 구하려는 요리사, 수공예가들이 함께하는 시장’, ‘먹는 것이 곧 농사짓는 것임을 느끼는 시장’이다. 도시의 시장에서 사라진 농의 가치가 이 작은 농부시장에서 복원되고 있다.
마르쉐@에 농이 보인다면 그것은 차이를 보여주는 다양성 때문이다. 마르쉐@에 참여하는 농부들은 농사규모나 영농기술 측면에서 경쟁력이 낮은 소농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양성이라는 큰 강점을 가진다. 새로 시작하는 가게 농부들 역시 도시농부, 귀농한 가족농, 그리고 가업을 이어 농사짓는 ‘2세 농부’ 등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도시 농부는 또 도시텃밭에서 100가지 이상을 소량 생산하는 가족농, 옥상 농부, 마을 주민들이 함께 농사짓는 커뮤니티 농부들과 양봉 농부 등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귀농 농가들은 시설 재배를 할 수 없는 도시농부들의 계절적 한계를 보완하여 농부시장에서 다양한 농산물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소규모 유기과수재배 농부, 풀농부, 씨앗을 이어가는 농부, 토종농부, 자연농법 농사를 짓는 농부 등 경작 방식이나 농사 방향, 작물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만큼시장에 나오는 먹거리들도 다양하다. 같은 당근, 토마토라도 농부에 따라 그 맛과 특성이 달라 다양하고 풍요로운 맛을 손님들에게 전한다.
대부분 소농이다 보니 양은 많지 않다. 대신 작게 포장된 채소와 간단한 자급기술을 활용하여 만든 가공품, 농가의 레시피로 만든 음식들까지 곁들여지면 작은 판매대는 더없이 풍성해진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지는 손님과의 대화가 있다. 시민들은 판매대에서 농가의 일상을 느끼고 농촌의 생활양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또 씨앗과 모종을 받아 기르며 농부와 마음을 이어간다.
마르쉐@에서는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가의 상호 협력이 돋보인다. 요리사는 농부가 생산한 제철 농산물로 요리하여 농가 생산물의 쓰임을 찾고 홍보하는 역할을 한다. 농부와 시민들 사이의 통역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요리사가 판매하는 개성배춧국을 맛본 손님은 개성배추라는 낯선 토종채소를 기꺼이 산다. 그리고 손님의 구매는 도시에서 토종씨앗을 이어가는 농부의 농사를 지속 가능하게 한다.
수공예가 역시 농가 재료를 이용한 수공예품을 기획하고 마르쉐@시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디자인한다. 또 예쁘게 포장하여 기획해서 농가 물품들이 연말연시 선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생산자간의 협력은 소비자를 농부들의 건강한 농사에 즐겁게 참여하도록 돕는다.
시장에 오는 손님들은 자원봉사자로 참여해서 설거지를 하기도 하고, 장바구니는 물론 음식을 담는 용기까지 미리 준비한다. 이들은 SNS를 통해 출점하는 생산자들의 정보를 확인하고 농부들과 요리사들과 나눌 질문도 함께 준비해서 시장에 함께한다.
마르쉐@에서 농부와 만남을 통해 소비자들은 농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마르쉐@ 생산자의 성장과 변화를 자극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농農을 배우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마르쉐@혜화동 시장은 하나의 유기적 커뮤니티이자 음식시민을 기르는 ‘거리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도시농업, 농민과 소비자를 잇는 다리가 된다
나 역시 여전히 서툴기만 한 도시농부다. 서울의 도시농업은 빠르게 성장해 이미 농사는 도시의 지도를 바꾸고 시민의 일상을 바꾸어 가고 있다. 다만 도시농업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로커보어의 라이프스타일을 시민들의 일상으로 만들어가는 삶 기획이 필요하다. 마르쉐@혜화동과 같은 농부시장이 더욱 많아지고 음식시민들을 기르는 동네 커뮤니티 부엌이나 지역농산물을 이용하는 지역식당,학교농장과 연결된 급식시설 등 기르고 조리하고 먹는 순환이 시민의 일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도의 개선도 필요하다. 현행 법률상 우리나라의 공원에서는 시장을 열 수 없다. 미국의 대표적 인 파머스 마켓들이 도시공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양상이다. 미국은 피클법, 커티지푸드법 등을 통해 농가의 직접 생산은 물론 가정집 주방에서 만들어진 가공품의 판매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만들기를 지원해왔다. 한국의 로커보어, 농부에게도 꼭 필요한 제도이다. 도시농업은 농촌의 농업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다.
도시농업은 농민의 수고로움을 이해하고, 농업의 가치를 도시민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한다. 농작물이 자라는 속도를 살피며 생명의 신비로움과 소중함을, 그리고 농부의 고마운 땀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도시의 농사, 안전한 먹거리 운동이 고질적 속도 주의에 휩쓸려 한때의 소비적 트렌드로 머물지 않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도시의 건전한 변화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
※필자 이보은: 여성환경연대 대안생활위원장. 시민활동가로 2011년부터 문래옥상텃밭, 홍대다리텃밭, 합정대륙텃밭, 마르쉐@시장 등을 기획했다. 현재 마르쉐@ 운영책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