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현대인은 도시에 살고 있다. 대부분이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고층 건물로 출근해 하루를 보낸다. 이처럼 고층 빌딩 숲에서 살고 일하는 현대 도시인에게 농업은 아득히 먼 과거이거나 추억의 대상일 것이다.
현대인의 삶이 농업과 농촌에서 멀어졌다고 해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점이다. 도시민 대부분은 자기가 먹는 것을 제 손으로 생산하지 못한다. 발전이니 문화니 하고 잘난 척하지만, 한 꺼풀만 벗기고 보면, 도시민의 존재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먹거리를 생산해주는 농민들이 없으면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발전의 역설이다.
먹거리, 도시민과 농업·농촌의 유일한 연결고리?
뒤집어 얘기하면 현대인들은 먹거리를 통해서야 겨우 농업, 농촌, 농민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먹는 쌀밥 한 그릇, 배추 한 포기, 사과 한 알을 통해 농農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려면 지적 자각 혹은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개인의 문제와 위치를 객관화해보고, 사회관계의 맥락에서 자신을 생각해보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먹거리와 관련된 이러한 성찰의 주체를 ‘먹거리 시민food citizen’ 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할 수 있다. 먹거리 시민은 먹거리를 통해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먹거리 체계’를 이해하고, 이것이 가진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주체이다. ‘먹거리 시민’이라는 말은 미국 코넬대 제니퍼 윌킨슨 Jennifer Wilkinson 교수가 2004년 ‘농업·먹거리·인간 가치 학회Agriculture, Food, and Human Values Society’ 회장 취임 연설에서 명확히 규정했다. 먹거리 시민은 특정 장소에 거주하면서 먹거리의 선택과 관련된 권리와 의무를 가진 행위자로, 안전하고 좋은 음식을 먹을 권리가 있고 식품과 관련한 정확한 정보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자신을 둘러싼 먹거리 체계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이러한 먹거리 시민은 대형마트에서 시장이 정해주는 가격에 주어진 식품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며, 종속적인 소비자passive, uncritical, and dependent consumers’와는 구별된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먹거리 시민이 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넘쳐나는 값싼 먹거리를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1주일을 생활하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다.
먹거리 시민은 대형마트에서 시장이 정해주는 가격에 주어진 식품을 아무 생각 없 이 사는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며, 종속적인 소비자passive, uncritical, and dependent consumers’와는 구별된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먹거리 시민이 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넘쳐나는 값싼 먹거리를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와서, 냉장고 에 넣어두고 1주일을 생활하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다.
대량 생산이 먹거리 체계를 바꾸다
사람들이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하는 것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구조적 제약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를 둘러싼 먹거리 체계는 크게 변화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먹거리 체계, 즉 ‘포드주의’ 먹거리 체계가 미국에서 완성됐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속에서 빠르게 퍼져갔다. 현대 먹거리 체계의 특징과 변화를 생산과 먹거리 유통, 소비로 나눠 각각 생각해보자. 우선 농업 생산의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들이 두드러진다.
첫째, 급증하는 도시 먹거리 소비자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20세기 초반에 새로운 농업혁명이 이뤄졌다. 특히 토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화학비료, 농약, 농기계 등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산업적 농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둘째, 육식 소비의 증가에 따른 공장형 축산 발전이다. 농가에서 가축을 몇 마리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축산업이 등장했다. (미국의) 농무부, 농과대학, 과학기술, 축산기업 등에 의해 진행된 체계적인 축산의 공업화 과정으로. 닭고기 생산에서 시작된 공장형 축산은 20세기 중반이후 돼지와 소 사육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셋째, 농기업 자본agri-business capital의 형성과 성장이다. 농업과 축산업이 대규모화, 집중화, 산업화하면서 농업 관련 자본들은 다양한 형태로 농축산업 부문에 진출했다. 종자, 비료, 농약, 농기계, 사료, 육가공 등의 농업 관련 하위 산업이 급속히 팽창했으며, 이에 따라 농업에 대한 기업의 영향력이 증가했다. 더불어 농민들의 자율성은 줄고 기업 및 금융 의존성이 커졌다.
이러한 농업 생산 부문의 변화는 먹거리 유통 및 소비 부문의 주요 변화와 동시에 진행됐다. 먹거리 유통, 소비의 주요 변화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상적으로 그리고 대량으로 먹거리를 판매하는 슈퍼마켓이 등장했다. 이는 지역의 전통적인 시장과 소규모 식료품점의 몰락과 함께 전국적 규모의 먹거리 수급과 먹거리 소비의 표준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 철도와 도로 발전으로 농산물의 장거리 이동이 빠르게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먹거리의 탈장소화 및 탈계절화를 추동했다. 셋째, 냉장고와 냉장차를 축으로 하는 냉장체계의 완성인데, 이는 앞의 두 과정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먹거리 보관, 유통, 소비의 모든 과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넷째, 외식 산업의 발전과 패스트푸드 식당의 등장이다. 음식을 먹는 전문화된 공간이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요리 ‘산업’이 발달했으며 이는 사회관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이제 세계는 대부분 포드주의적 먹거리 체계에 편입되었으며, 거대 농식품 기업들과 대형 유통기업들이 세계의 농민과 먹거리 소비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농과 소비자가 먹거리의 변두리로 밀려나
자본과 기계화를 앞세운 포드주의 때문에 현대 농업은 자연스레 ‘기업 중심’으로 흘러간다. 소수의 거대 초국적 기업들이 먹거리 생산과 유통, 소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업식량체제Corporate Food Regime’라 불리는 새로운 먹거리 체제 아래, 소농과 소비자는 점점 더 먹거리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포드주의 먹거리 체계가 대체로 국가 단위로 정부에 의해 조직되고, 농산물의 교역도 주로 한 국가 내부에서 이뤄졌다면, 이 새로운 기업식량체제는 세계화 속에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즉 세계를 단위로 먹거리의 생산, 유통, 소비가 조직되는 경향이 강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전 지구적 조정과 조직화에 있어 소수의 초국적 기업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농식품 자본의 금융화 financialization 경향이 강화되면서, 농식품 기업들이 금융 부문이나 토지 투자 등에도 뛰어들고 있다. 초국적 농기업들은 종자에서부터 곡물 유통, 육류 가공 및 유통, 국제 교역, 대규모 소매 등 먹거리의 전 분야를 통합적으로 지배한다. 예컨대 미국의 곡물 메이저인 카길Cargill은 미국 곡물 수출량의 25%, 미국 내 육류 유통량의 25%, 그리고 우리나라 곡물 수입량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으며 그 밖에도 과일은 돌Dole, 델몬트Delmonte, 육류는 타이슨Tyson과 필그림 Pilgrim, 종자 및 유전자 공학 부문은 몬샌토Monsanto 등이 우리의 먹거리 생산과 소비 전 과정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초국적 농기업들은 종자에서부터 곡물 유통, 육류 가공 및 유통, 국제 교역, 대규 모 소매 등 먹거리의 전 분야를 통합적으로 지배한다. 예컨대 미국의 곡물 메이저인 카길Cargill은 미국 곡물 수출량의 25%, 미국 내 육류 유통량의 25%, 그리고 우리나라 곡물 수입량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다.
이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시장 지향적 체제는 여러 가지 정치적 제도들로 뒷받침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WTO 체제로 1995년 체결된 농업협정Agreement on Agriculture은 기업식량체제 실현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농업이나 먹거리 부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나 규제는 정당성을 찾기 어렵고 초국적 농식품 기업이 먹거리 생산과 소비 체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전 세계의 농민들, 특히 소농들의 경제적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었다. 또한 농업이 생산한 가치 가운데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소농들이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먹거리 정치, 시민이 움직여야
세계화된 기업식량체제에 위협을 느낀 농민들의 풀뿌리적 저항의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세계 소농들의 연대운동인 비아 캄페시나Via Campesina이다. 또한, 소비자들 역시 다양한 모습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공동체 지원농업, 농민장터, 도시농업, 시민농업, 슬로푸드 등이 있다.
이러한 대안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들이 바로 먹거리 시민이다. 한국처럼 바삐 돌아가는 사회에서 먹거리 시민으로서의 덕목 혹은 요건을 수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형마트에 가서 값싼 먹거리를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유혹은 달콤하다. 생산자에게도 친환경 농업은 몸도 고되고, 신경 써야 할일이 많은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주고 싶다면, 그리고 그들이 사는 환경이 조금 더 안전하고 깨끗하길 원한다면, 그리고 굶주리거나 나쁜 음식을 먹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먹거리를 둘러싼 권리를 존중하고, 의무를 귀하게 여기는 새로운 대안적 먹거리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먹거리 정치는 적어도 두 가지 수준의 시민적 개입과 참여를 의미한다. 하나는 대형마트보다는 생협이나 공동체 지원농업 등의 관계적 유통망을 선택하고, 농민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는 먹거리를 통한 생활정치이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농업 정책과 식품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는 것이다.
먹거리 시민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먹거리 체계를 만드는 일을 먹거리 정치food politics라고 할 수있다. 먹거리 정치는 적어도 두 가지 수준의 시민적 개입과 참여를 의미한다. 하나는 음식을 사 먹을때 생산자와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생활정치의 형태다. 대형마트보다는 생협이나 공동체 지원농업 등의 관계적 유통망을 선택하고, 농민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는 것이 먹거리를 통한 생활정치이다. 이러한 과정은 개인을 둘러싼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소비자들과 관계를 맺는 농촌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제도적 정치로, 정부의 농업 정책과 식품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는 것이다. 이는 지방자치단체의 먹거리 관련 조례나 정부의 농식품관련 입법 등에 대한 먹거리 시민들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 두 가지 수준의 정치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먹거리를 둘러싼 생활정치와 제도정치는 상보적이며, 두 수준이 함께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먹거리 체계를 만들 수 있다. 먹거리 시민들이 만든 새로운 정치를 통해 개인의 건강해지고, 공동체가 변화하며, 우리 자식들이 행복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필자 김철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대안 농식품체계, 먹거리 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새로운 농촌사회학』(2012, 집문당),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변동』(2003, 고려대출판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