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프랑스 메독 마라톤 참가기
프랑스 와인을 대표하는 축제, 메독 마라톤
새벽 6시 반, 프랑스 보르도 시내 생장역(St. Jean). 쫄바지 스타일의 마라톤 복장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싶어 머뭇머뭇하면서 기차표를 사러 갔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대합실 같은 곳에 들어서니 이미 한 무리의 슈퍼맨들이 진을 치고 있는가 하면 저 멀리서는 몸을 온통 초록빛으로 칠한 외계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좀 더 과감하게 복장을 준비할 걸 그랬다며 한순간에 걱정이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지난 9월 7일 세계적인 와인 산지인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린 메독 마라톤(Marathon du Medoc, 세계적인 와인산지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매년 열리는 대회로 와인과 스포츠, 코스프레를 결합한 독특한 형태를 띤다. 편집자 주)에 참가했다. 몇 년간 꿈꿔 왔던 여름휴가 계획이었다.
메독 마라톤은 역사가 깊다. 1984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벌써 제29회째다. 무려 3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다. 처음은 메독 지역의 마라톤 마니아들만으로 시작됐지만 보르도 와인의 명성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메독 마라톤은 보르도뿐 아니라 프랑스 와인을 대표하는 스포츠 행사이자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마라토너들에게는 런던 마라톤, 뉴욕 마라톤 등처럼 일생에 한 번은 꼭 참가하고 싶은 대회이기도 하다.
메독 마라톤은 뛰어야 하는 거리가 정규 풀코스(42.195km)라는 것 말고는 일반 마라톤 대회와는
좀 다르다. 우선 매년 주제에 맞춰 코스프레 복장을 해야 한다. 올해 주제는 SF였다. 선수들이 슈퍼맨, 외계인으로 변신했던 이유다.
코스프레 복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와인이다. 메독 마라톤은 코스 중간 중간 급수대에서 각 샤토(보르도에서 포도밭과 와인을 제조·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와이너리에 붙는 명칭, 편집자 주)들이 준비한 와인을 내놓는다. 그래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꿈의 대회로 꼽히기도 한다. 마라톤 대회에서 선수들에게 술을 먹이다니. 기록보다는 축제를 한바탕 즐기라는 의도다. 물론 술을 먹고도 뛸 수 있을 만한 건강 상태라는 의료 증명서를 사전에 제출해야 참가 신청이 가능하다.
세계적인 와인 산지 보르도 포도밭을 뛰다
출발한 지 십여 분이 지나자 말로만 듣던 보르도 포도밭이 나타났다. 보르도 젖줄인 지롱드 강 왼편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우리나라 포도들이 머리 위로 덩굴이 있다면 와인을 만드는 이곳 포도나무들은 키가 커봐야 허리 높이에 불과했고, 포도송이들이 나무의 밑동 가까이에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바로 몇 알을 따서 입속으로 넣었다. 알은 엄지손톱보다 작은 크기였지만 당도는 일반 포도보다 훨씬 높았다.
26km 지점을 넘어서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샤토 라피트 로칠드(Ch. Lafite Rothschild)가나타났다. 1985년 프랑스에서 와인 등급을 제정할 때 1등급을 받은 단 5개의 샤토 중 하나이다. 유명세만큼 와인 한잔을 먹기 위한 선수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그 줄을 다 기다리자니 30분은 족히 걸릴상황이라 할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뛰는데 무리가 될까 봐 한 모금씩만 마신다고 했는데도 양볼이 발그레해지는 게 알딸딸하다. 하긴1km도 안되는 사이마다 와인을 마시라고 부어 주니 술이 깰 틈이 없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뛰는 것은 뒷전이고 이제 흥에 겨워 제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샤토에서 악단들이 흥겨운 연주를 시작하자 슈퍼맨과 외계인들이 뛰어들어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이 분위기와 와인을 흠뻑 즐기다가 가기로 했다.
뛰면서 즐기는 환상의 ‘마리아주’
37km 지점을 지나자 이제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무릎도 욱신거리고 발바닥도 아프다. 이제 정말와인은 한 모금도 먹지 말고 물로 수분만 보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진 않았다. 가장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코스가 남아있었던 것.
진정한 술꾼들은 다 알겠지만 술만으로는 사실 반쪽짜리다. 그 나라 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 나라 음식이 같이 나와야 술도 제맛을 발휘한다. 막걸리엔 전, 맥주엔 치킨, 이런 식이다. 와인에서는 이 궁합을 ‘마리아주(mariage)’라고 부른다. 주최 측은 골인 지점을 5km 앞두고 전체요리인 굴과 이에 맞는 화이트와인부터 시작해서 1km마다 환상의 마리아주를 선보였다. 굴과 상큼한 화이트와인으로 입맛을 돋우고 나니 소 갈빗살 스테이크 한 조각과 묵직한 레드와인이 있었고, 이어서는 치즈, 그리고 마지막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달콤한 화이트와인으로 마무리가 됐다. 뛰면서 숨 가쁘게 즐기는 코스요리라니, 평생 잊지 못할 정찬이다.
결승점에 골인하고 나니 기록은 6시간 5분 50초. 완주로 인정하는 컷오프 타임이 6시간 30분이라여유 있게 생각했는데 자칫하면 넘길 뻔 했다. 이날 참가한 총 7,905명 중 5,282등을 했다. 완주는포기하고 아예 눌러앉아서 와인을 마시기로 한 선수들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람객, 그들을 맞이하는 3,000여명의 자원 봉사자
메독 마라톤은 참가 인원을 8,500명으로 제한한다. 보통 한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 인원보다도 적어 호텔 예약 등이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마라톤 출발점에서 한두 시간 떨어진곳까지 숙박시설은 모두 동나 있었고, 대회 이후 와이너리 투어도 샤토들마다 일주일 이상씩 방문 예약이 꽉 찼다고 했다. 알고 보니 올해 메독 마라톤 관람객만 10만 명. 인구 70만 명의 지역에 10만 명이 몰렸으니 북새통이 당연했다. 선수들도 참가자의 20%가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온 외국인이다. 하긴 필자만 해도 프랑스 시골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뛰겠다고 장장 11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보르도로 왔으니 할 말 다했다. 무엇이 이렇게 사람들을 보르도로 불러들였을까.
와인과 함께 즐기는 흥겨운 지역 축제
우선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과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 즉 보르도만의 ‘맛’이 메독 마라톤엔 스며들
어 있다. 포도밭을 뛰고 와인을 마시면서 무엇이 보르도 와인을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게 했는지를 몸소 느끼게 한다.
두 번째는 선수들을 응원하며 와인과 음식을 내어줬던 수십 개의 샤토들이다. 샤토의 주인과 직원들이 나와 직접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메독 마라톤이 선수들만의 것이 아니라 포도 수확을 앞둔 와인 농가들의 축제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참가 선수들이 스스로 연출하는 볼거리가 있다. 코스프레 복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출발하자마자 경찰관 복장을 한 선수는 호루라기를 불며 포도밭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있는 슈퍼맨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외계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합창하기 시작한다. 코스 곳곳에서 각본 없는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를 보기 위해 곳곳에 아예 캠핑용 식탁과 의자로 자리 잡고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길가에 나와서 슈퍼맨이나 외계인이 손 한번 쳐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라톤 대회라기보다는 선수들은 물론 지역민과 관람객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보르도 지역 전체의 축제인 셈이다.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광.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맛과 문화. 함께 즐길 준비가 되어있던 지역민들. 생각해보니 한국의 농어촌에도 충분히 있는 자원들 아닌가. 한국에서도 막걸리와전을, 안동 소주와 문어를 집어 먹으며 뛸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필자 안상미: 헤럴드경제 경제부 기자. 농림축산식품부 출입기자로 농업의 6차 산업화와 전통주활성화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9년 사하라 사막 250km를 6일간 뛰는 ‘사하라 레이스’를 완주했고, 2012년에는 역시 같은 거리를 달려야 하는 ‘요르단 레이스’에 도전해 성공했다. 앞으로 전통주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