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광화문 네거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삭막한 도시의 한복판, 문득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풍경이 있습니다. 교보빌딩 외벽에 내걸린 ‘광화문 글판’입니다.
광화문 글판은 1991년 대산 신용호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교훈과 직설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외환위기로어려웠던1998년,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글판으로 만들자”는 대산 선생의 뜻에 따라, 마음을 두드리는 글귀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렇게 21년, 광화문 글판도 대산농촌문화재단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광화문 글판과 함께 올해 도시민의 시선과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계단과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운 상자 논입니다. 계단에는 처음 듣는 희한한 이름표를 단 토종 벼가 즐비했고 건너편 광장에서는 전국에서 재배되는 벼 품종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벼를 보고 신기해했고 예쁘다, 멋지다고 했습니다.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농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 전 광장에서는 추수행사를 열었습니다. 풍작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풍족하게 했습니다.
광화문의 논은 농업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고, 농업의 문제는 국민의 문제이며 농업은 국민의 것이라는 대명제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서는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오래전 학교에서 밀어낸 농업을 사회가 다시 끌어안았다는 평가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들은 농업과 농촌을 더욱 적극적으로 아끼기 위한 일들을 열심히 합니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에 힘을 기울입니다.
일본만 해도 농촌체험은 초등학교 정규교과과정에 들어있습니다. 또 아주 어릴 때부터 농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규슈의 한 유치원에서는 진입로에 고무대야, 깨진 화분과 그릇등에 모를 심고 아이들이 양손을 뻗어 모를 만지며 지나가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한 많은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농업과 농촌이 국민의 것이라는 공감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유치원 학부모가 함께 장을 담그고 나누며 아이들이 같은 음식을 먹으며 자라게 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농업과 농촌이 소중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합니다.
2011년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이 사상 최저치를 밑돌고, 남아돈다던 쌀의 자급률도 겨우 80%를 넘었습니다. 우리 식탁의 절반 이상을 외국산 먹거리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며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식량위기와 거대 농식품기업의 지배에 따른 농촌사회의 붕괴라는 심각한 상황은 우리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은 농업과 농촌이 중요하다는 국민적 신뢰를 바탕으로 자국민의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역먹을거리운동, 공동체운동, 친환경급식, 도시텃밭가꾸기 등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우리 국민의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노력들이 많이 보이지만, 더욱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농업과 농촌이 국민의 것이라는 공감과 신뢰가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올가을 새롭게 걸린 광화문 글판의 글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보듬는 사랑은 우리의 농업을 많이 닮아있습니다. 무시무시했던 폭염과 가뭄, 뒤이어 온 태풍들을 이겨낸 기특한 곡식들을 고맙게 거두는 농부의 손길에서 농민이 행복한 농업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