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는 잠수함을 타는 수병이었다. 당시 잠수함에는 산소측정기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토끼를 데리고 탔다고 한다. 토끼는 사람보다 산소부족에 먼저 반응한다. 토끼가 호흡곤란으로 죽게 되면 수병들은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잠수함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한다. 항해 중 토끼가 죽자 이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다. 호흡기가 민감해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던 게오르규가 그 역을 맡았다.‘ 잠수함 속 토끼’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올 6월 미국 중서부의 가뭄으로 옥수수와 콩 작황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미 농무부 전망에 따르면 올해 옥수수 생산량은 100억 7,000만 뷰셸로 지난해에 비해 14% 감소했다. 콩 생산량도 지난해보다 14% 감소했다. 미 농무부는 연말 옥수수 가격은 지난해보다 15~38%, 콩 가격은 29%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엔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9월 초 성명을 내고“콩, 밀, 옥수수 가격 급등에 따른 현재 세계
식량시장의 상황은 2007~2008년 식량위기의 재연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상당하다”고 경고했다.
2008년 식량위기 당시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으며 2010년 러시아·우크라이나 가뭄으로 인한 식량위기는 이곳의 밀을 주로 수입하는 튀니지, 이집트 등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반면 유럽, 미국 등 선진국들은 식량위기를 직접 체감하지 못했다. 세계 곡물 파동 속 민감한 ‘토끼’는 빈국과 빈곤층들이었다.
식량위기는 구조적인 문제
식량위기는 이상기후가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상기후는 식량위기의 촉매제에 불과하다. 빈국과 빈곤층들이 식량위기에 취약하게 된 것은 세계 식량산업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했다. 2000년 이후 세계 곡물시장은 곡물 수요가 가파르게 증가했지만 공급이 따라오지 못하면서 수급불균형 문제가 발생했다.
곡물소비량은 1980년 이후 연간 14억 톤 수준에서 현재 22억 8,700만 톤으로 급증했다. 중국, 인도 등 신흥국에서의 곡물 소비가 급격히 늘어났고 미국의 바이오연료 의무사용 증대 등으로 곡물 수요가 지속적으로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국제사회는 옥수수를 연료로 만드는 미국의 바이오연료 정책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40%인 1억 2,000만톤 가량이 바이오연료로 사용된다. 미국 내에서 식량으로 소비되는 옥수수는 11%, 가축용 사료는 3%다. 나머지 13%는 수출된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는 미국이 현재의 2배로 바이오연료 시설을 확대하면 2020년에 옥수수 가격이 72% 상승하고 현재 시설을 유지하더라도 26%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유엔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바이오연료 정책을 일시 중단하라고 미국에 요청했지만 바이오 연료 산업에 뛰어든 석유업체, 거대 농식품 복합기업 등의 미국 내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 등 농산물 시장개방 압력이 거세지면서 곡물 수출국에 대한 수입국의 의존성도 심화됐다. 옥수수는 미국, 브라질,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4개국이, 대두는 브라질과 미국 2개국이 전 세계 무역량의 80%를 수출하고 있다. 이들 곡물의 유통은 주로 카길, ADM, 벙기, 루이 드레퓌스 등 4대 곡물메이저들이 맡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역시 2003~2008년 수입된 3대 곡물의 50%가량을 이들 4개 곡물메이저가 담당했다. 주요 수출국과 국제 곡물 메이저들이 공급량을 급격히 줄이면 세계적인 식량파동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기에 경기 부양을 위해 풀린 돈들이 많아지면서 갈 곳 잃은 국제투기자금들이 곡물시장에 몰
려든 것 역시 곡물가격 급등 현상에 일조했다. 선진국들의 주도로 곡물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빈국과 빈곤층에게 몰리는 것이 현재 국제곡물시장의 모습이다.
곡물 파동에 민감한 ‘한국 축산’
한국도 올 연말부터 애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아 식탁 물가가 치솟을 전망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연말부터 미 중서부발 애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아 내년 1분기까지 밀가루 30%, 전분16%, 유지류 11.2%, 사료 10%의 가격상승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누구보다도 빈곤층과 축산업계가 ‘호흡곤란’ 증상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축산인들 중에는 오래전부터 사료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쓰는 분들이 많지만 이번 사료가격 폭등을 피해가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춘천에서 소 100여 마리를 키우는 전기환 씨(51)는 3년 전 곡물사료를 완전혼합발효(TMF)사료로 교체했다. 하루 두 차례씩 한우 100여 마리가 한 달간 먹는 사료의 양은 20kg 사료 1,240포대로 25톤에 이른다. 값으로 치면 720만 원을 웃돈다. 옥수수, 대두 등 수입 곡물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가는 혼합발효사료 이지만 옥수수 등의 수입산 곡물의 비중 탓에 가격 상승을 피해 갈 수 없다.
충남 아산에서 돼지 2500마리를 키우는 장명진 씨(49)는“6개월간 돼지를 키우면서 돼지 한 마리에 들어가는 사료값만 25만 원 정도”라고 말했다.
기타 자돈 생산비 등을 합치면 그의 농장에서 기르는 돼지의 원가는 40~45만 원 정도다. 그는“현재 돼지 한 마리 출하가격이 40만 원으로 적자를 보고 있다”며“사료 가격이 더 오르면 돼지에 들어간 투자비용을 회수하기도 전에 도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씨는“돼지 농장이 규모화되어 자동사료라인에 따라 사료가 공급되기 때문에 오로지 곡물사료만 이송이 가능하고 돼지 종자가 곡물만 먹고 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개량돼서 (예전 방식대로) 조사료를 주면 살이 안 오른다”고 덧붙였다. 현재 양돈업은 급등한 사료가격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내 농업기반 확보 방안이 없다
정부는 애그플레이션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단기적 방법으로 관세인하로 수입 곡물 가격을 낮추고 사료 자금을 지원해 가격을 낮추기로 했다. 식용수입콩 할당 관세 인하(5%→0%), 식용 수입콩정부 지정판매가격 인하(1,020원/kg→950원/kg), 사료업체 원료구매자금 지원확대, 축산농가 사료현금구매자금 융자지원(1,200억 원) 등의 해결책을 내놨다. 군부대에서 자생하고 있는 갈대 등 조사료 자원도 활용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해외곡물유통망을 확보해 2021년까지 국내 곡물소비량의 35%인 700만 톤을 도입할 계획이다. 국내 밀 소비를 늘리고 밀 생산량을 2배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대책도 내놨다.
정부 대책의 대부분은 곡물의 해외조달, 자금지원 등에 그치고 있다. 과거 애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마다 단골로 나온 대책이기도 했다. 현재 정부는‘2015년 전체 곡물 자급률 30%’를 목표로하고 있지만 목표 자급률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국내 경작지 확보 면적, 경지이용률 제고 방안, 농가 소득 보장 등 국내 농업기반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전무한 실정이다.
성명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실장은 “현재 곡물 자급률을 설정해도 실질적인 노력은 미흡하다”며 “자급률이 법제화된다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가 밀 자급률을 현재 1%에서 2020년 10%로 높이겠다고 하는데 현재 농가들이 밀을 생산해도 판매가 안 되고 있다”며“정부가 자급률 목표를 세웠으면 종자 연구·개발, 밀제품 품질, 가격문제 등 단계별로 해결하려 해야지 밀 소비를 늘려달라고 국민만 바라보는 것은 안된다”고 말했다.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농지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국내에서 서울시 9.5배 면적의 농지가 사라졌다. 올해 상반기 동안에도 여의도 면적(848ha)의 8.3배에 달하는 농지가 사라졌다. 역대 정권별로 농지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농지전용은 점점 늘어났다. 시행령을 개정해 농지전용부담금을 면제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농가 수입은 줄어들고 농민들이 농촌을 하나 둘 씩떠나다 보니 농지는 계속 사라지는 추세다.
황명철 농협경제연구소 축산경제연구실장은“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기반인 농지를 최
소한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할지부터 목표로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실장은 “수치 목표가 없으면 농지 전용이 무분별하게 이뤄져 자급률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식량위기의 파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국내 자급률을 높여야 하고 국내농업기반 마련이 자급률 제고 정책의 최우선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쌀 자급률 30년 만에 최저…식량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해
“한국은 미국이 보조금으로 일본산 쌀을 구입하는 것을 허락한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그 대가로 100만 톤 이상의 미국산 쌀을 구입했음”(1981년 1월 29일자 미 국무부 문서) 기록적인 냉해피해로 대흉년을 기록한 1980년. 당시 막 집권한 신군부로서는 난리가 났다. 전두환은 정권을 잡자마자 벌어진 악재에 여론이 더 악화될까 우려해 수백만 톤의 쌀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의 쌀 수입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미국산 쌀 가격은 톤당 200달러에서 550달러로 껑충뛰었다.
우선 안남미를 포함해 약 90만 톤의 쌀이 미국에서 수입됐다. 부족한 양을 일본에서 수입해 오
려 하자 미국의 쌀 생산자협회와 곡물기업 등이 미 의회에 압력을 가해 이를 막았다. 한국 정부는 미 캘리포니아 쌀 50만 톤을 더 구매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통사정을 하고 난 뒤에야 미국의 허락을 얻어 겨우 일본의 재고 쌀을 들여올 수 있었다.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곡물에 대한 자급률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질 경우곡물수출국과 다국적 곡물기업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농식품부는 지난 9월, 2011년 기준 쌀 자급률 잠정치가 83%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1980년 이후 30년 만에 최저 수치다. 2010년 9월 발생한 태풍 곤파스의 영향이 컸다. 벼 알곡이 여무는 시기에 충남 지역을 강타한 곤파스는 5만 300ha의 논에 백수 피해를 입혔다. 충남지역의 벼는 알곡이 하얗게 말라버렸다. 쌀 자급률이 하락하자 곡물자급률도 덩달아 27%에서 23%로 하락했다. 한국 역시 식량위기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잠수함 속 토끼’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 필자 이재덕: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대산농업전문언론장학생 출신으로 꽃, 나무, 숲을 좋아하는 시골스러운 도시남자이며 한국농업기자포럼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