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규 상희복분자농장 대표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주는 아늑한 그늘 밑, 나무 탁자 앞에 앉자마자 “살아온 야기 쫌 들어볼라요?”하며 묵직한 두루마리 종이를 꺼내는 안문규 씨(53). 돌돌 말려있는 종이를 펼치니 붓글씨로 빽빽이 적어놓은 연서(書)다.
일찍 철이 들었던가,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선 안되겠다 싶은 마음으로 상경,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등포역 가판에서 시계장사를 하던 청년은 건너편 큰 옷가게 여인을 마음에 두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여인에게 말 한마디 눈빛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대신 두루마리 종이를 구해 매일매일 편지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3개월, 추석을 앞두고 귀향하는 여인에게 마침내 묵직한 두루마리 편지를 짐짓 무심히 건넸다. 그렇게 인연이 닿았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의 부모가 반대를 했다. 어쩔 수 없이 장사를 접고 다시 고창으로 내려가 작은 서점을 차렸다. 그 서점이 다시 노래방이 되고 농장이 되었다. 그 즈음 태어난 막내딸 상희의 이름을 따 ‘상희복분자농장’이라 이름을 지었다.
“황무지 같은 척박한 밭을 갈고 또 갈고……. 그곳에 사슴을 키우고 땅콩이랑 포도를 심었는데 사실 별로 소득이 없었어요. 그러던 중에 우연히 복분자 나무를 구해 심었는데, 첫 수확 해에 태풍 루사로 싹 쓸려나갔는데도 수익이 좋았지요.”
그 이듬해 2003년, 1천 평 짜리 하우스를 짓고 본격적으로 복분자를 재배했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판매를 하면서 소비자와 직거래를 시작했다. 고창군에서는 최초의 전자상거래였다. 2005년, 복분자가 불임에 좋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복분자를 찾는 수요가 갑자기 증가했고 안분규 씨의 복분자 농장은 2천평, 4천 평 규모로늘어났다.
아이고, 참 힘들게 사쇼 그 성님은
열정은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일본으로 식품 연수를 갔어요, 거기서 흑초를 보았죠. 일본의 흑초는 우리것이랑 좀 달라서 현미막걸리를 2년간 숙성시켜서 만든 거예요. 거기서 복분자 식초를 생각했죠.”
2006년, 복분자 식초연구를 시작했는데, 마침 고창군청의 R&D사업의 도움으로 식초를 개발할 수 있었다. 2009년 지금의 가공공장을 설립하고 2010년 3월 특허를 받았다.
그가 복분자 식초를 만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왜 그렇게 힘들게 살려고 하냐고 했다. 복분자 원액이나 음료로도 충분히 부가가치를 올리는데 그 어렵다는 식초에 코를 빼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올만도 했다.
“농민으로서 제품을 생산해서 나오기까지 해보니 선구자들이 너무 존경스러워 보이더라구요. 농민들은 생산뿐만 아니라, 가공, 판매, 자금문제 등 어려움이 많아요. 게다가 기존의 브랜드가 시장을 잡고 있기 때문에 진입하기가 어려웠어요. 대기업하고 싸움을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차별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복분자 와인을 만들어 효소의 먹이가 되는 종초를 접종시켜서 1년 이상 항아리에 숙성하여 식초를 만든다. 대기업의 희석식초와 철저히 차별화한 순수 식초다. 복분자 식초는 입소문을 타고 그 소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올해 2월과 3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리스의 교민들에게 수출하기도 했다.
생산보다 가공, 가공보단 차별
“무농약 재배는 사실 사명감이 없으면 안됩니다. 친환경재배를 해도 일반재배와 수익면에서 별 차이가 없고 또 모든 풀을 손으로 다 뽑아줘야 하니 사람의 힘이 그만큼 더 들지요.”
하지만 인터넷 판매로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는 안문규 씨는 소비자의 신뢰를 안고 무농약 재배를 고집한다.
이런 와중에 그가 생산한 복분자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지만, 계속적인 비용 증가와 환경 변화에 맞서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야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다양한 가공품을 계속 만들고 있다. 이제 상희복분자농장은 복분자 생산부터 가공, 판매까지 원스톱으로 하는 곳으로 농업인들의 필수 견학코스가 되었다.
안문규 씨는 최근 농사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생산, 가공, 유통, 판매까지 전 과정을 다 잘하려니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앞으로 주력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선택하여 방향을 전환하려고 합니다.”
그는 올해 과감하게 복분자 생산규모를 줄이고 가공과 판매를 하면서 블루베리, 초코베리, 체리 등을 심고 도시민이 쉬어갈 수 있는 체험농장에 비중을 두려고 한다.
“멀티 플레이어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작지만 내실 있는 농장을 만들 겁니다.”
귀농인, 저지르기 전에 준비하라
그는 귀농인이다. 귀농하기 전 안문규씨 부부는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정말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철두철미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점을 운영하며 배운 경영기법을 농사에 적용하면서 다른 농민들과는 다른 생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귀농하려는 예비 농부들, 혹은 가공산업으로 확장하려는 농민들에게 1.5차의 단계를 밟으라고 조언한다.
“저는 본격적인 가공산업을 하기 전에 원액중탕기 2대로 시작했어요. 그렇게 조그맣게 시작해서 판매해본 거죠. 농민들이 흔히 가공을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점이라는 건 자기가 재료를 생산한다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작정 뛰어들 것이 아니라 자본, 운영비, 판매처, 내부요소를 전부 다 파악해야합니다. 예를 들어 근교 농업은 인력확충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런 농촌에선(인력수급을) 어떻게 할 건지까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5,6년간 복분자 식초를 준비했지만 아직도 미진한 것들이 많아 힘든 상황이라고 토로하면서 농민의 소규모 가공에 대해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농민들의 소규모 가공이 세금 문제 때문에 묶여있지만, 유럽의 경우에서 보듯이 농민이 자신의 농산물로 만든 가공품, 농가가공품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우리 농민들이 경쟁력을 높여갈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려움에 단련이 되어 모든 상황에서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안문규 씨. 여태까지 돈만 못 벌었지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다며 웃는다.
“어릴 적 아버지가 한 겨울의 어느 날 무릎까지 물이 차는 개울가로 저를 데려가 징검다리를 손수 놔주셨어요. 앞으로 저는 복분자식초로 후손들에게 징검다리를 놔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치며 열심히 달려왔다는 안문규 씨, 반걸음 앞선 그의 행보가 새로운 농업의 장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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